채원병의 아침 묵상 생명나무와 선악과,,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 묵상 <140> 생명나무와 선악과,,

정원교회 0 2808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행동을 보다 보면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부르시고 자신을 삼 년 동안이나 따라다니며 동고동락한 제자가 앞으로 할 악행을 뻔히 아시면서도 왜 막지 않으셨을까? 가룟 유다는 나중에 자신의 죄를 크게 뉘우치고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구원을 받았을까? 

예수님께서는 왜 가룟 유다의 배반을 막지 않으셨을까,,, 가룟 유다가 배반하지 않으면, 십자가의 사명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셨을까? 아니면, 예수님조차도 가룟 유다의 배반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일까? 이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가룟 유다의 문제는 단순히 이 천년 전에 예수를 팔아먹은 한 패륜아의 이야기가 아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 이야기는 구원에 관해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아는 게 중요하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4). 그러나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지는 않으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을 다 이루실 수 없는 분이신가,,,중대한 질문을 야기한다. 왜 그럴까,,,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이루실 능력이 없는 분이신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실제로 이루어지는 일과는 다를 수도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라는 문제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동하도록 꼭두각시나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꼭두각시처럼 찬양하라면 찬양하고, 로봇처럼 시키는 대로 일하고 하는 그런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다. 거기에는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기계적 관계는 있을지 몰라도, 인격적인 관계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독립된 인격체로 창조하셨다. 독립된 인격체라는 말은 자유도 있지만, 자기의 행동에 대한 책임도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꼭두각시나 로봇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의 행동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꾐에 넘어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은 사건은 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도 있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동산의 모든 열매를 네 마음대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니 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들 앞에는 영생에 이르게 하는 나무도 있었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나무도 있었다. 영생과 죽음에 대한 선택의 자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류의 조상인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보다는 사탄의 유혹에 자신을 넘겨주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었다. 자신의 욕심에 끌려 사탄에게 마음을 내준 것이다.

가룟 유다 앞에도 영생과 죽음의 선택이 있었다. 영생을 주시는 예수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사탄의 유혹에 자신을 넘겨주어 자기 욕심을 따를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선택이 그의 앞에는 있었다. 주께서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다에게도 계속 구원의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강제로 믿게 하지는 않으셨다. 유다는 영생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영생보다는 욕심에 자신의 운명을 맡겼던 것이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에는 관심이 없고, 선악과에 관심이 있었던 것처럼,,,. 선악과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였지만, 생명나무는 특별히 관심을 끌 만큼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우리 앞에도 영생으로 인도하는 예수라는 생명나무와 멸망으로 인도하는 선악과 나무가 있다. 영생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들어가는 사람이 적지만, 파멸로 인도하는 죽음의 문은 크고 길이 넓어 대부분의 사람이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생명나무는 십자가의 길이라, 매력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죽음의 길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며, 탐스럽다. 

예수를 구원의 주로 믿고 십자가의 길을 걸을 것인가, 자신의 욕심을 따라 죽음의 길로 갈 것인가 하는 결정은 자신의 몫이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구원의 기회를 주시며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믿음을 주시고, 그들을 마지막까지 책임지시며 영생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끝까지 구원을 거부하는 사람은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다. 각자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 데 대해서 핑계를 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배반하고 자살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하게 된다. 유다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받은 돈을 성소에 던져 넣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마 27:3-5).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쳤으며, 받은 돈도 돌려주려고 했는데 받지 않자, 성소에 던져 넣고 몹시 괴로워하다 자살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다도 결국은 구원받은 것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가 있다. 유다는 과연 구원을 받았을까,,,

사도행전 1:18은 유다가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지고 창자가 다 흘러나오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유다의 비참한 죽음은 유다에 대한 동정론을 일축하게 된다.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것과 회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회개는 단순히 죄를 인정하고 후회하는 차원이 아니다. 회개는 마음과 삶의 축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우리 앞에는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가 놓여있다. 선택은 자유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신의 책임이다. 그 결과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일 수도 있고, 영원한 파멸의 길일 수도 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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