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 배신의 강을 건너,,,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 묵상 <141> 배신의 강을 건너,,,

정원교회 0 4076


다윗 왕은 사랑하는 셋 째 아들인 압살롬이 반역하는 아픔을 겪은 사람이다. 다윗이 아들의 반란군에 쫓겨 예루살렘을 떠나는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의 부하들이 모두 그의 앞을 지나갈 때에, 온 땅이 울음 바다가 되었다. 왕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가니, 그의 부하도 모두 그의 앞을 지나서, 광야 쪽으로 행군하였다.“(삼하 15:23) 

다윗 왕이 자식의 반란으로 예루살렘을 떠날 때 기드론 시내를 건너갔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배반당하고, 그 배반을 이겨내며 광야로 가기 위해서는 기드론 시내를 건너야 했다. 다른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겟세마네의 기도’가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기드론 시내’라는 표현이 나온다. 요한복음 18장 1절에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드론은 ‘어두운’ ‘혼탁한’이라는 뜻이다. 기드론은 예루살렘 보다 60~120m 정도 낮은 계곡이라 건기에는 마른 계곡이지만, 우기에는 시내를 이룬다. 그러다 보니 시내가 흙탕물이다. ‘어두운’ 또는 ‘혼탁한’이란 뜻을 가진 기드론이란 말은 여기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반당하시고,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실 때도 이런 마음이셨을 것이다. 제자의 배반으로 인해 당하는 아픔을 이겨내시며 주님께서는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가셨다. ‘어둡고 혼탁한’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셨다.살다 보면 견디기 어려운 일을 만날 때가 있다. 다윗처럼,,, 주님처럼,,, 견디기 힘든 아픔을 이겨내며 기드론 시내를 건너야 할 때가 있다.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반당하는 것처럼 큰 아픔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배신당하는 아픔이 더 큰 법이다.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다윗의 아픔이나 주님의 아픔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당하는 모든 아픔을 상징하는 아픔이라고 볼 수 있다. 인생을 살다 보면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아픔들이 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거나 오해를 받는 아픔도 있고, 사업이 갑자기 어려워져서 겪는 경제적 아픔도 있다. 또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아픔도 있고, 사랑하는 이와 이별해야 하는 아픔도 있다. 어떤 종류의 아픔이던, 인생을 살면서 그 아픔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기드론이라는 아픔의 강을 건너야 할 때가 있다,,,

기드론 시내를 건너간 다윗은 제사장인 사독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궤를 다시 도성 안으로 옮기시오. 내가 주님께 은혜를 입으면, 주님께서 나를 다시 돌려보내 주셔서, 이 궤와 이 궤가 있는 곳을 다시 보게 하실 것이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싫다고 하시면, 오직 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나에게서 이루시기를 빌 수밖에 없소."(삼하 15:25-26)

하나님의 궤,, 언약궤다. 언약궤에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 있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담겨있다고 해서 보통 언약궤라고 하는데,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언약궤를 이미 반란군의 손아귀에 들어간 예루살렘 성 안으로 다시 옮기라고 했다. 참,,,,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이는 도저히 할 수가 없는 일이다. 

내가 주님께 은혜를 입으면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가서 언약궤를 보게 하실 것이고, 주님께서 나를 싫다고 하시면, 오직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내게 이루어지길 빌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 살인죄와 간음의 죄를 범한 적도 있지만, 다윗은 역시 다윗이다. 아들에게 배반당하고 반란군에 쫓기면서도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만 완전하게 맡길 줄 아는 믿음이 있었다. 설사 그 결과가 자신이 원하는 바와 정반대로 나온다 할지라도 다윗은 모든 것을 받아들일 각오와 믿음이 있었다. 언약궤가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의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자신의 뜻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중요했다. 설사 자신이 왕위를 되찾지 못하고 광야의 방랑자가 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반란군을 진압하러 전투에 나가는 군 지휘관들에게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고 부탁했다. 다윗은 자신을 배반하고, 왕위를 빼앗고, 자기 후궁들과 만민 앞에서 동침을 하고, 자신의 목숨까지 노리던 아들을 끝까지 배려하고 사랑했다. 

주님께서도 이런 마음으로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가셨을 것이다. 신명기 21장 18절 이하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사람이 완악하고 패역하여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부모가 징계해도 순종하지 않으면, 장로들에게 가서 고발하고, 마을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서 죽이고, 시체를 나무에 달아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라,,, 패역한 자가 누구인가,,, 우리들이다. 완악하고 패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께서 징계해도 순종하지 않은 자들,,, 그들은 돌에 맞아 죽어 나무에 달려야 할 자들이며,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마땅한 자들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런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십자가는 극악한 죄인들이 달리는 저주의 자리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저주를 대신 받기 위해 기드론 시내를 건너셨다. 

배신의 강을 건너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시며,,, 저주의 자리로 가셨다.“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리는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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