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묵상 칼과 십자가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묵상 <142 > 칼과 십자가

일요시사 0 3211


주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계실 때, 가룟 유다가 군대와 성전 경비병들을 대동하고 주를 잡으러 왔다. 그들의 손에는 등과 횃불과 칼과 몽둥이가 들려있었다. 체포에 순순히 응하지 않으면, 칼로 위협하고 몽둥이로 패서라도 끌고 가겠다는 뜻이리라. , 주여~~


그러자 성격 급하고 혈기 왕성한 베드로가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었다. 역시 베드로다. 얼마나 용감한가,,, 군인들을 상대로 혼자 맞서 싸우겠다니! 얼핏 주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가 잠시 후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만 홀로 남겨놓고 도망을 갔다. 이런 베드로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베드로가 용맹스럽게 칼을 뽑아 든 것은 예수님이라는 든든한 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삼 년 동안 따라 다니면서, 이분이 누구신지,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잘 알고 있었다. 온갖 병을 다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거센 파도와 폭풍을 말 한 마디로 잠잠하게 하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그야말로 마음만 먹으시면 할 수 없는 일이 없는 전능하신 분이다. 이런 분이 옆에 있는데 뭐가 두렵겠는가? 그런데 주의 말씀을 듣고 나서는 바로 줄행랑을 쳤다. 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쳤을까?

 

주님께서는 먼저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만져서 낫게 하시고( 22:51),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26:53) 예수님께서는 열두 군단도 더 되는 하늘의 군대들을 부르셔서 자신을 잡으러 온 병사들은 물론이고 로마제국도 물리치실 수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능히 그렇게 하시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무엇이 두려우랴,,,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여기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이란 물론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한다. 이 말씀 한 마디에 베드로를 비롯해서 열한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만 남겨놓고 모두 도망을 갔다. 이들은 모두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주와 함께 죽으면 죽었지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자들이다( 26:35).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무기력하게 죽음을 받아드리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힘 있을 때만 예수님과 함께 죽겠습니다 하고 맹세했지, 예수님이 힘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하시자 바로 배신을 때린 것이다. 그들은 십자가의 죽음이 갖는 사랑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칼과 십자가,,,, 베드로가 빼어 든 칼은 무엇을 위한 칼인가,,, 주님을 잡으러 온 악한 자들을 치기 위한 정의의 칼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칼로 세상을 다스리러 오신 분이 아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세상을 구하러 오신 분이다. 베드로는 아직 십자가의 사랑을 알 수 없었다.

 

세례 요한도 옥에 갇혀있을 때, 베드로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정의의 칼로 악한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줄 알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듣고 있자니, 이 분이 정말 메시아가 맞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세상의 악을 심판하기는커녕 엉뚱한 일만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옥에서 듣자니 장애인들, 병자들,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능력이 있으신 분께서 왜 엉뚱한 일만 하고 계실까,,, 왜 정의의 칼로 세상의 모든 악을 진멸하지 않으실까,,, 궁금하기도 하고,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당신이 진짜 메시아가 맞냐고 물어보게 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태복음 11 5)

 

예수님께서는 장애인들과 병자와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을 찾아 다니셨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림받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하시면서 몸소 사랑을 실천하셨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자 그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맹인이 보게 되고, 못 걷는 사람이 걷게 되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고, 못 듣는 자가 듣게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들에게 사랑의 복음이 전파되어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이 땅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았던 사람들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인이었다. 이 땅의 어둠에 갇혀있던 모든 인류에게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징표였다. 이제 슬픔과 절망과 도탄에 빠진 자들에게 놀라운 주의 사랑이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의 사랑이 임하자, 슬픔이 기쁨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주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가장 비참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시작된 주의 사랑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주의 사랑은 물밀듯이 세상의 가치체계를 무너뜨리며, 세상을 정복해나갔다. 주께서는 정의의 칼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으로 세상을 정복해 나간 것이다. 로마는 칼로 세상을 정복했지만, 주께서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세상을 정복하셨다.

 

기독교의 가치관은 칼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이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쉽게 정의의 칼을 빼어 드는가,,, 사회악을 향한 정의의 칼은 필요하지만, 그 칼조차도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더욱이 남을 향한 정의의 칼은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피를 흘리게 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은 모든 상처를 치유한다. 주께서는 자신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의 귀도 치료해주셨다.

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0 Comments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