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묵상 하나님이 묶이시다...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묵상 <143 > 하나님이 묶이시다...

일요시사 0 1997

하나님을 믿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무신론자는 아닌데,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의 삶 속에 믿음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직을 독점하던 사두개파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안내해서 데리고 온 로마군대와 성전경비병들에게 체포되어, 밧줄로 묶인 채로 안나스에게로 끌려가셨다. 안나스는 주후 6년부터 약 10년 동안 대제사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그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들도 모두 대제사장을 역임했고, 사위인 가야바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해의 대제사장이었다. 대제사장직을 안나스와 다섯 아들, 그리고 사위가 돌아가면서 해먹고 있었다. 그들 중 안나스가 실세였기 때문에 병사들은 예수를 안나스에게로 끌고 간 것이다. 

원래 대제사장은 임기가 없는 종신직이었다. 그런데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면서부터는 대제사장이 수시로 바뀌게 되었다. 로마는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의 종교를 인정해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최고 종교지도자인 대제사장을 세우는 데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유대인들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력을 확고히 했던 것이다. 

안나스는 이런 로마권력과 결탁해서 자신의 후임으로 자기 아들들을 차례로 대제사장이 되게 하였고, 이제 사위까지 대제사장에 앉혀 놓았다. 돈과 권력,, 일단 맛보면 빠져 나오기 힘들다. 대형교회의 세습문제가 오버랩 되지만, 이 문제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안나스 일가를 돈과 권력의 유혹에 넘어간 종교지도자라는 관점에서 보게 되면, 문제의 포인트를 놓치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 즉 믿음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믿음은 어디에 문제가 있었을까?

당시 대제사장직은 사두개파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의 믿음이 어땠는지를 알게 되면, 대제사장들이 왜 그렇게 타락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타락한 게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원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천사나 마귀와 같은 영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적 세계도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죽은 자의 부활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었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의 존재도 믿고, 제사도 드리지만,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보이는 현실세계가 전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사람들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지, 보이지도 않는 세계를 어떻게 믿는가,, 천사가 어디 있고, 마귀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당신 옆에 천가 있고, 마귀가 있는가? 성령이 당신의 삶 가운데 있고, 마귀가 당신 곁에 있는가? 정신을 차리시라. 믿을 것을 믿으시라. 이 세상 살고 나면 끝이다. 죽은 자의 부활이니,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 세계가 어디 있는가? 미련하고 약한 자들이나 이런 것을 믿는 것이다. 

이 세상은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힘을 주고, 당신의 삶을 인도하고 다스린다고? 엉뚱한 데서 삽질하지 마시라. 이성적으로 생각하라. 어리석고 약한 인생들이여, 자기 인생은 자신의 것이다. 이 세상 살고 나면 모든 것은 끝이다. 이 세상 살면서 누릴 만큼 누리다 가는 게 인생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예배는 드리지만, 하나님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 바로 사두개파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실질적 무신론자라고 한다. 이런 실질적 무신론자들이 상당히 있다. 그들의 삶은 언제나 현실적이고 합리적이고 세속적이다. 평소에는 생각이나 가치관이나 사는 모습이 세상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오직 일요일에 예배드릴 때만 기독교신자가 되는 사람들이다. 종교행위만 있지, 신앙의 삶은 없는 자들이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에만 갇혀있는 자들이다. 현실이라는 세계에 갇혀 현실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삶의 현실은 신자들의 삶을 옭아매는 밧줄이 되기도 하고, 억압하는 사슬이 되기도 한다. 현실의 삶이 너무 힘들어서 그럴 수도 있고, 현실적인 여러 문제들이나 욕심이 원인일 수도 있고,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너무 큰 데서 오는 좌절감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현실의 문제에만 사로잡히다 보면, 보이지 않는 세계와 주를 보지 못할 수 있다. 현실적인 문제들이 거대한 절벽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밧줄에 묶여 안나스 앞에 끌려가셨다.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밧줄에 묶여 인간의 심판대 앞에 서신 것이다. 보이는 모든 세계와 보이지 않는 모든 세계의 주께서 피조물인 인간의 손에 묶인 바 되셨다. 심판의 주께서 인간의 심판대 앞에 서셨다. 인간 앞에서 온갖 모욕과 모멸을 당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믿는 신의 모습이다. 

왜 하나님께서 밧줄에 묶여 인간의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으셨을까? 왜 주께서는 이 모든 수치와 모멸을 참아내시며 묶인 바 되셨을까? 오직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묶인 자들을 구하시기 위해서다. 저들을 묶고 있는 죄와 사망의 끈을 끊어내시기 위해서다. 저들의 삶을 옭아매고 억누르고 있는 모든 억압의 사슬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다. 

주께서는 억눌리고 묶인 자들에게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묶인 바 되셨다. 주께서는 어떤 고난과 모멸과 굴종도 참아내시고, 기꺼이 받아내시면서 묶인 자들을 찾아 오신다. 그분께서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당신 곁에 와 계신다. 그 주를 만나고 있는가? 그 주께서 당신의 삶 가운데 동행하시며 살아 계신가? 보이는 것이 전부인 자들에게, 주는 보이지 않는 분이시다. 무엇이 당신의 눈을 가리고 있으며, 무엇이 당신의 삶을 묶고 있는가? 신자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며, 보이지 않는 주와 동행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0 Comments
제목
광고 Space available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