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묵상; 열두살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묵상; 열두살

일요시사 0 2410
누가복음 2장에는 예수가 열두 살 되었을 때의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예수가 열두 살 되던 유월절에, 예수의 부모는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갔다.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다 보니 예수가 보이지 않았다. 워낙 혼잡한 상황이라 아마 다른 동행들과 함께 가고 있으려니 생각하고 하룻길을 갔는데, 그때서야 예수를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놀란 부모는 다시 예루살렘에 가서 사흘 동안이나 예수를 찾아 다니다가 성전에 앉아있는 예수를 만날 수 있었다. 예수는 성전에서 선생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는데, 그 지혜에 모두가 놀라워하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찾아서 반갑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해서 이렇게 말했다.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찾아오신 분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사람의 아들이기도 하다. 우리와 똑같이 사십 주 동안 여자의 몸 안에서 자랐으며,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다. 아기 때는 어머니의 젖을 먹고, 대소변도 어머니가 치워줘야 했다. 그렇게 부모의 돌보심 아래에서 자라난 예수는 열두 살이 되었다고는 해도, 어머니가 보기에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어머니의 애타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당신은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입니까,, 신의 아들,, 예수다. 

성경은 이후 예수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예수의 키가 자라간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지혜가 자라갔다는 말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분은 창세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요 1:2, 3).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그분의 지혜가 자라갔다니,,, 언뜻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다. 

예수는 철저하게 인간이 되셨고,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몸도,, 지혜도,, 자라나는 과정이 있었다. 그분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가 되어 만나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주께서는 실제로 삼십이 되어서야 지상에서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분의 인성과 신성이 온전히 하나가 된 후에야 지상사역을 시작하신 것은 아닐까,,,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신학적으로는 흔히 이렇게 표현한다. “예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하나이며, 이 둘은 섞일 수도 없고, 분리될 수도 없다.” 신으로서의 예수야 처음부터 완전무결한 분이지만, 신성과 인성이 온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지혜가 자라는 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열두 살이 된 예수는 이제 사람의 아들 예수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자기 정체성을 공표한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자신의 신성을 확실하게 인지하게 된 것이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수에게도 지혜가 자라는 기간이 필요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신앙의 나이는 얼마나 될까? 열두 살이면 완전 어린아이는 아니고, 그렇다고 성인도 아닌 다소 어정쩡한 나이다. 유대인들은 어린아이에서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성인으로 넘어가는 나이를 열두 살로 보았다고 한다. 열두 살은 어린아이에서 벗어나 성인이 되기 위한 준비단계에 접어드는 나이다. 내 안에 계신 예수를 제대로 만나야 할 나이다. 그러나 앞으로 한참 더 자라가야 할 나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롬 8:9하). 신자란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신 자들이다(롬 8:10상). 우리는 과연 내 안에 계신 예수를 어느 정도나 인식하고 있을까,, 예수를 아는 지혜가 어느 정도나 자란 상태일까,, 내 안에 계신 주를 어느 정도나 바라보며 살고 있을까,,,

미국의 도널드 그레이 반하우스라는 목사는 사탄이 완전히 장악한 도시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술집은 모두 문을 닫을 것이고, 사람들은 도덕질서를 잘 지키고, 웃음이 가득하고, 서로 화평할 것이고, 교회는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아니, 이건 천국의 모습이 아닌가? 왜 도널드 목사는 사탄이 장악한 도시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을까?

사탄의 목적은 인간들의 시선을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에만 가두어 두는 데 있다. 도널드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도, 천국도 보이지 않는 교회, 오직 현실적인 행복만 추구하고 있는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현실세계를 외면해서는 안 되지만, 현실세계에만 갇혀 사는 사람은 아직 예수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풍랑이 일어 거센 파도가 칠 때도 바다의 깊은 곳은 잠잠하다. 세상풍파가 때로는 거친 파도처럼 삶을 힘겹게 할지라도, 주를 바라보는 사람은 마음의 평강을 지킬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을 때조차도 말할 수 없는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감옥 안에서 목욕을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식사를 변변히 할 수 있었을까,, 대소변조차도 편하게 볼 수 없었으리라. 바울이 자신이 갇혀있는 감옥만 바라보았다면, 결코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감옥에서도, 자신 안에 계신 주를 볼 수 있었고, 현실을 넘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감옥 안에서도 주께서 주시는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아직도 현실의 감옥에 갇혀서 살고 있지는 않은가,,, 열두 살,,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인지해야 할 나이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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