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는 이것을 내게 주노니 행 3장 1-10절 NZ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기독교


 

내게 있는 이것을 내게 주노니 행 3장 1-10절 NZ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일요시사 0 2694
예수를 믿고 따르는 제자의 삶이란 예수님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주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분의 가장 고귀한 목숨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라고 움켜쥐고 주지 않는 삶은 절대로 성도의 삶도 아니고 제자의 삶도 아닙니다. 내게 있는 것을 주는 삶이야말로 바로 성도의 삶이요 제자의 삶입니다. 주는 삶이 받는 삶보다 복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문에 앉아 구걸하던 한 걸인을 돌아보고 그에게 복음을 주고, 그에게 치유를 준 이야기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그간에 우리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열심히 성전을 찾고,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이제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처럼 성전 주변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직도 성전을 들어오지도 못하고, 그 앞에 앉아 있는 영혼들을 돌아봐야 합니다. 나아가 베드로와 요한이 “내게 있는 이것으로 내게 주노니” 라고 말한 것처럼, 오늘 우리도 사람들에게 있는 것을 나눠주어야 합니다. 복음을 주고, 예수의 이름을 주고,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와 우리의 신앙이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세 가지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기도에 우선순위를 두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입구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입니다.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평생 동안 일어나지도 못하고 걷지 못하던 자의 육신 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살리는 능력을 행하기 전에 먼저 무엇을 했는가?’ 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올라가는 길에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성전에 올라갔습니까? 이들은 “제 구시, 기도 시간에”(1절)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의 삶이 복음을 전하고 복음의 능력을 행하는 삶을 살기 전에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할 때는 기도는커녕 졸고 자느라 정신없던 그 제자들이 이제는 기도의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사랑을 베푸는 것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하기 전에 반드시 더 먼저 해야 할 게 있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도 33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모든 일보다 가장 먼저 하신 일이 기도입니다. 그것도 저 광야로 들어가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완전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기도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도는 중요합니다. 성도가 어떤 일의 시작을 기도로 하면 그것은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기도로 준비하고 밀고 나가면 때로는 내가 미련해서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도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그 일을 온전케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삶의 능력입니다. 


2. 예수 이름의 능력을 소유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자가 성전 미문(입구)에 앉아 있었던 이유는 예배하러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구걸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고 할 때도, 이 사람은 여느 때처럼 돈을 구걸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를 외면하지 않고 그를 정면으로 보면서 “우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당당하게 “우리를 보라”고는 말했지만, 사실은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당당하게 “우리를 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은금과는 절대 비교할 수 없는 더 중요한 보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6절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베드로의 이 말은 정말 놀라운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때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또한 예수님을 절대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다가, 예수님이 체포되시자 예수님을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한 여자가 와서 “당신도 저 예수와 한 패가 아니냐?”고 할 때, “나는 그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며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베드로 안에 예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있는 것 같았지만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온데간데없고 그냥 빈껍데기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완전반대입니다. 비록 내게 은과 금은 없지만, 나에게는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한 분이 계신데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떤 것보다 귀한 예수님이 바로 내게 있습니다.”그러므로“이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이제는 걸으시오.”오늘 예수 믿는 자는 무늬만이 아니라 그 속에 예수님이 계셔야 할 줄로 믿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 믿는 자는 예수 이름의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3. 일어나 걷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성전 입구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을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라고 표현합니다.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에는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사람이 앉은뱅이로 살아온 기간은 무려 40년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루 종일 있는 곳은 바로 성전 미문이라는 곳입니다. 성전 미문은 예루살렘 성전의 여러 문중에 이방인의 뜰에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문이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에 미문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 성전 미문에서 하루 종일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것이 이 걸인의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람의 모습은 성도가 벗어야 할 세 가지 모습을 보여줍니다. 

1) 그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성전에 올 수 없는 자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스스로 자기 의지에 따라 성전에 오는 사람이 아니었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성전에 오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앉은뱅이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앉은뱅이의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겨우 하나님 앞에 나오는 신앙이 아니라 이제는 내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2) 이 사람은 수십 년을 성전에 와서 앉아 있었지만 성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성전 입구에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도 성전 입구에서만 앉아 있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전 입구에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 걷고 뛰고 주님을 경험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3) 그는 수십 년을 성전 미문에 있었지만 영적인 은혜를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40년 동안 구한 게 오직 은과 금이었습니다. 본문에 놀라운 사실은 그가 구한 것은 세상의 헛된 은과 금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그에게 준 것은 세상의 헛된 은과 금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는 삶이었습니다. 은과 금이 귀합니까? 일어나 걷는 것이 귀합니까? 우리 모두도 세상의 썩어질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더 귀한 은혜와 능력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NZ광림교회 정존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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