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묵상;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묵상;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

일요시사 0 1803
예수께서 유대인들에 의해서 빌라도에게 끌려가셨을 때, 빌라도가 예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다. 당시 유대 지역을 다스리던 자는 헤롯 안티파스였다. 유대의 총독인 빌라도가 당시 유대 지역의 왕인 헤롯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빌라도가 지금 예수에게 엉뚱해 보이는 질문을 한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해 고소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였다. 

빌라도도 아마 속으로는 유대인들의 고발이 모략이라고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외모와 풍기는 인상을 보고,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을 터. 그래도 유대인들이 이른 새벽부터 이 자를 죽여야 한다고 난리를 치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일단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간단히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고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빌라도의 심문에 대한 답변을 통해서 믿는 자들이 속해있는 나라의 정체성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선언하셨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에 속한 나라의 왕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같은 말의 반복 같지만, 두 번째 하신 말은 헬라어로 약간 다른 의미가 있다. 주님 나라의 기원이 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My kingdom is not from here.”(NRSV) “My kingdom is from another place.”(NIV) 

내 나라,,주의 나라다. 주의 나라가 세상에 속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나라의 근거가 세상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 뿌리를 두고 있지도 않고, 세상 가운데 화려하게 세워진 나라도 아니다. 그 나라는 하늘에 뿌리를 두고 있고, 하늘에 속한 나라다. 주께서 하늘에서 오신 것처럼, 그 나라도 주와 함께 하늘에서 온 나라다. 여기에 우리 기독교인들과 우리가 속해 있는 나라의 정체성이 있다. 기독교인은 하늘에 뿌리를 박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늘의 가치관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어보았을 때, 그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왕만을 생각했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해서 예수를 빌라도 앞으로 끌고 온 유대인들도 자신들이 속해 있는 나라에 대해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나라는 모두 이 세상에 속한 나라였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나라가 전부인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는 세상나라의 왕이 아닌, 주의 나라의 왕으로 오셨다. 그 나라는 본질적으로 세상과는 구분이 되는 나라다. 기원이나 소속이나 세상나라와는 전혀 다른 나라다. 그런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만들려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세상에서의 출세와 부귀영화를 가져다 주시는 분으로 예수님을 섬긴다면,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예수의 이름으로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아예 대놓고 바알이라는 우상을 섬겼다. 바알은 돈과 권력과 섹스를 상징하는 우상이다. 한 마디로 풍요로운 세상과 쾌락을 약속하는 신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인간들의 욕심이 만들어낸 허구의 신이다. 이것이 우상의 본질이다. 욕심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것이 우상숭배다.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 산 전투에서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 450명을 몰살시키고 나서, 호렙 산에 가서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이제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 당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이라는 우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 엘리야 혼자 남아 외롭게 싸우다, 엘리야도 절망감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엘리야가 보기에 세상은 타락이 극심했고,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하나님보다 세상을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칠천 명이라는 숫자는 물론 상징적인 숫자다. 칠이라는 완전수와 천이라는 충만한 수를 합해서 칠천 명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엘리야가 보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는 자는 자기 혼자만 남은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완전하고도 충만한 수의 믿음의 사람들을 확보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런 믿음의 사람을 ‘남은 자’라고 한다. 세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다. 주의 나라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남은 자’들이다. 

주께서는 세상나라의 통치자에게 심문을 당하셨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마찬 가지로 오늘날에도 주의 나라는 언제나 심각한 도전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시대에도 ‘남은 자’ 칠천 명을 확보하셨던 것처럼, 세상의 물결이 홍수처럼 주의 나라에 밀려들어와 있는 것 같아도, 주의 나라는 흔들림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눈에 보이는 교회가 순결한 믿음을 지켜내고, 견고하게 서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과도 같다. 그 안에는 참 믿음의 사람, 즉 ‘남은 자’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주의 나라는 보이는 교회 안에 보이지 않는 나라로 실재한다. 

‘남은 자’들이란 주의 나라에 남아 주의 나라를 지키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주의 나라를 지키는 영적 용사들이며, 희망의 씨앗들이며, 부흥의 불씨들이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주의 나라에 속한 ‘남은 자’들을 통해서 그 나라를 지켜가시고, 세워가시며, 확장해 가신다. 주의 나라는 이런 참 믿음의 사람들, 바로 ‘남은 자’들의 나라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롬 9:27, 28)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0 Comments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