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묵상 150; 바라바 예수냐, 그리스도 예수냐?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묵상 150; 바라바 예수냐, 그리스도 예수냐?

일요시사 0 2989
예수를 심문한 빌라도는 아무 죄도 찾지 못하고 석방하려 했지만, 유대인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자 빌라도는 유월절에는 죄수 중 한 명을 풀어주는 유대인들의 전례를 들어 예수를 풀어주자고 유대인들에게 제안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제안을 거부하고, 바라바라고 하는 강도를 풀어달라고 소리쳤다.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요 18:40) 

‘강도’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강도라는 뜻도 있지만,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로마에 무력으로 항거했던 열혈당원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바라바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몸 바쳐 싸웠던 자유투사요, 영웅이었다. 유대인들이 바라바의 석방을 요구한 것은 이해가 가지만, 예수 대신 바라바의 석방을 요구했다는 문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들은 왜 예수를 믿지 못했을까?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42, 44절에서 이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몰고 간 것도,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 친 것도, 모두 근본적인 원인은 한 가지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했다면 나를 믿었으리라,,,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랑을 전혀 느끼실 수 없었다. 그들이 하는 행동은 언제나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했고, 믿음은 형식적인 종교행위로 전락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보다는 세상적인 욕심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들의 가식적인 믿음을 보시고,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였더라면 나를 믿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믿음은 거짓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인가!

믿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기본적인 질문에 다시 맞부딪히게 된다. 그냥 믿는다고 다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믿음과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마음의 헬라어 ‘카르디아’는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믿음의 고백이다.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예수를 나의 주로 고백합니다.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이런 고백이 나올 때, 비로소 마음으로 믿는다라는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단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한다는 지적 동의가 아니다.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고백이다. 또,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하였다.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이제 자신의 믿음을 아멘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믿음의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결단이고, 표현이다. 인간의 행위가 구원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지만, 구원 받아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이에 대한 반응이 삶으로 고백되어야 한다. 주님의 은혜를 알고,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그 사랑이 삶 가운데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성화의 열매가 없는 믿음이란 없다. 그 열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예수를 사랑하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열매요, 구원에 이르는 열매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는 믿을 수 없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안식일을 잘 지켰고, 제사를 드렸으며, 십일조나 예물도 잘 드렸다. 그러나 그들은 놀랍게도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놓쳤다. 그들이 실제로 사랑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자신이었고, 세상이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을 억지로 붙들어 왕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홀로 산속으로 피하셨다. 그들이 원한 것은 빵이었지 예수가 아니었다.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 것이 아니라, 빵을 주는 예수를 원했던 것이다.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했던 자들이 지금은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치고 있다. 

바라바라는 이름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바라바라의 이름을 어떤 사본에는 바라바 예수로 기록하고 있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에 물었다. "여러분은, 내가 누구를 놓아주기를 바라오? 바라바 [예수]요?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요?"(마 27:17[표준새]) 

바라바 예수와 그리스도 예수,,, 바라바 예수는 현실적인 영웅이다. 바라바 예수는 현실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유익을 가져다 주는 예수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주의 나라를 가지고 오신 예수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현실적인 영웅인 바라바 예수를 살리라고 외쳤다. 그들은 영원한 나라와 생명과 평강을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다. 바라바는 아람어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아버지의 아들’은 메시아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유대인들은 ‘바라바 예수’를 살리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우리 앞에도 ‘바라바 예수’가 있고, ‘그리스도 예수’가 있다. 빵을 원하는가, 아니면 예수님 그분을 원하는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 이후 약 40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고,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메시아를 알아볼 수도 없었고, 메시아 대신 바라바 예수를 원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하나님 사랑을 잃었기 때문이다(요 5:42). 대림절 기간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느 ‘예수’를 원하고 있을까?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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