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묵상 151; 가시면류관, 사랑의 면류관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묵상 151; 가시면류관, 사랑의 면류관

일요시사 0 2643
새 해가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15년의 끝자락에 와 있다. 정신 없이 살다 보니 한 해가 또 기울어간다. 세월이 참 빠르다. 시간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붙잡아 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일정하지만, 나이에 따라 시간의 속도는 다르게 느껴진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더 빠르게 지나간다. 이렇게 한 해, 두 해 지나다 보면,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인생도 끝난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삶을 마치고 나면,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이 활짝 열리게 된다. 눈물도 슬픔도 고통도 없는, 영원한 안식과 평강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된다. 그날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빛이 찬란한 나라에서 의의 면류관을 쓰고 주님 앞에 서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담대하게 선포한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의의 면류관이란 믿음의 승리자들에게 주어지는 승리의 화관이다. 우리 성도들의 진정한 소망은 여기에 있다. 주께서는 이 날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시고 찾아오셨으며, 하늘보좌에서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신다. 바울은 성도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성도란 그날을 사모하며 오늘도 주와 함께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길은 때로는 힘들고, 좌절하고, 슬픔과 눈물로 얼룩질 때도 많지만, 그 날을 사모하며 우리는 능히 승리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주의 형제 야고보는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셨다고 말한다(약 1:12). 주께서는 죄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그 생명은 이 세상에서 잠시 누리는 삶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다. 그 생명의 면류관은 예수를 믿어 죄에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쓰게 될 의의 면류관, 승리의 면류관이다. 그런데 주께서는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셨다고 하시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겠다고 하셨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곧, 예수를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바울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고 있다(롬 8:28).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날에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쓰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하신 일을 안다면, 우리는 아버지와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그날에 우리에게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 가시면류관을 쓰셨다. 예수에게 채찍질을 하고, 가시 면류관을 씌운 것은 로마병사들이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한 자들은 바로 우리다. 우리의 죄악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말한다(사 53:6). 

양은 목자가 없이는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가축이다. 그래서 목자를 잃은 가축은 제 멋대로 다니다가 사나운 짐승에게 잡아 먹히거나, 홀로 헤매다 죽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라는 목자가 계셨지만, 제 멋대로 살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되었다. 하나님께 제사도 드리고, 예물도 드렸지만, 목자가 없는 양처럼 제 멋대로 살았다. 자기 멋대로,,, 각자 자기 살기에 바빴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는 일주일에 한 번 예배 때 인사 드린다. 예배 때 빈 손으로 오는 것도 아니다. 땀 흘려 고생해서 번 돈도 일부 하나님께 바친다. 나머지 시간은 나의 시간이다. 하나님, 저를 내버려 두세요~~ 주일에는 찾아 뵙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에게 고멜이라는 음란한 여자와 결혼하라고 하셨다. 자기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들과 정을 통하며 제 멋대로 놀아나는 음란한 여자 고멜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하나님을 두고 자기 욕심대로 살기에 바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는 바로 고멜과 같은 음란한 여자다. 음란한 여자와 함께 살아야 하는 호세아 선지자의 아픔은 바로 하나님의 쓰라린 아픔이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 이사야 선지자는 이것을 죄악이라고 말하고 있다.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가 여기에 잘 나타나 있다.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이 죄다. 자기를 사랑하며,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이 죄다. 이렇게 본다면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는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떠나 제 멋대로 자기 욕심을 따라 사는 음란한 고멜이다. 

주께서 가시에 찔리시고,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반역한 죄에 대한 형벌이다. 그 방법 밖에는 우리 죄인들을 죄악에서 건져내실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시는 인간의 죄와 고통을 상징한다. 로마병사들은 가죽채찍으로 예수를 패고, 가시나무로 관을 만들어 씌우고,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조롱하며 손으로 얼굴을 때렸다. 유대인의 왕, 예수가 인간들에게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받으며 쓴 면류관은 가시면류관이었다. 

주님께서는 그 가시면류관을 기꺼이 쓰셨다. 그날에 우리에게 영원한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주시기 위해서, 기꺼이 가시면류관을 쓰셨다. 그러하기에 그 면류관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빛나는 영광의 면류관이며, 주님께서는 진정 우리의 왕이 되신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예수를 더욱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께서 쓰신 가시면류관의 가시는 우리의 죄의 가시이며, 우리의 잠자는 영혼을 찌르는 사랑의 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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