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 묵상 <157>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정원교회 0 25580


19장 12절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려고 힘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큰 소리로 외친다. “이 사람을 놓아주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한 마디에 빌라도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풀어주려고 했던 마음을 접게 된다. 

‘가이사’는 원래는 로마의 황제였던 줄리어스 시저의 성이다. 영어식으로 읽으면 시저, 헬라어로는 카이사르, 라틴어로는 케사르, 우리 식으로 음역하면 가이사다. 원래 로마황제 율리어스 시저의 성이었던 ‘가이사’는 나중에 로마의 황제를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그런데 ‘가이사’ 즉 ‘시저’와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산부인과에서 아기를 정상분만하기 힘들 때 하는 수술인 제왕절개수술을 영어로 ‘cesarean section’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가 바로 ‘시저’에서 나온 말이다. ‘시저식 절개술’이란 뜻이다. 줄리어스 시저가 태어날 때, 모친의 배를 째고 꺼냈다는 설도 있고, 줄리어스 시저 시대에 처음으로 배를 째고 아기를 꺼내는 수술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지만, 제왕절개수술에서 ‘제왕’이라는 말은 바로 로마황제였던 ‘시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정상분만이 도무지 불가능한 위급상황에서는 산모와 아기를 모두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기라도 살리기 위해서 산모의 배를 짼 것이 제왕절개수술이었다. 이때 아기는 목숨을 건질 수 있지만, 산모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산모를 죽이지 않고는 아기를 살릴 수 없는 위급한 상황에서 시행하는 수술이 제왕절개수술이었다. 

가이사식의 수술인 제왕절개수술은 어떻게 보면 십자가 사건과 비슷한 면이 있다. 성부 하나님의 아들이신 하나님,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 죄인들이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산모가 피 흘려 죽음으로써, 아기를 살린 것처럼 말이다. 이 방법밖에는 우리 죄인들을 살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그렇게 죽을 죄인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자기가 어느 정도 죄인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내가 왜 죽을 죄인인가 하는데 대해서는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극단적인 방법 말고, 그냥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구원하실 수는 없었는가 하는 의문도 생길 수 있다. 

죄는 헬라어로 ‘하마르티아’라고 하는데, 원래는 ‘화살이 표적에서 벗어난 것’을 가리키는 단어다. 즉,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것이 죄인 것이다. 하나님을 중심축으로 나의 모든 것이 돌아가는 상태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인 것이다. 그런데 ‘나’를 중심축으로 해서 나의 삶이 돌아가는 상태가 죄다. 죄의 핵심에는 ‘나’라는 존재가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마음과 생각과 가치관과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자리하지 않고, 자기가 중심에 있는 상태, 이것이 죄의 본질이다. 한 마디로 자기가 주인이 되고, 자기가 왕이 되는 것이 죄의 핵심인 것이다. 

로마서 3장 9절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선언한다. 어느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완벽할 수는 없다.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죄를 단순히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다. 죄에 대한 값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 때문이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희생제사를 통해서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셨다.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있는 대속죄일에 속죄의 제물로 드려질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고 백성들이 지은 죄를 짐승에게 떠 넘기는 기도를 하고, 짐승의 피를 지성소에 뿌린다. 백성들이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속죄짐승에게 임하는 것이다. 이 때 하나님께 바쳐지는 흠이 없어야 한다. 십자가 사건은 구약시대의 희생제사의 완성이다. 

그런데 왜 꼭 예수의 피여야 하는가? 속죄를 위해 바쳐지는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하는데, 흠이 없는 인간, 즉 죄인이 아닌 자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이 되어 찾아오신 예수만이 흠 없고, 죄 없는 희생제물로서의 완전무결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십자가에 임하는 성부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의 심판은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한 심판이다. 그러하기에, 그 진노의 심판은 우주적 심판일 수밖에 없다. 인간 중에는 흠이 없고, 죄가 없는 자가 없기도 하거니와, 이러한 성부 하나님의 죄에 대한 우주적 심판을 받아낼 수 있는 자도 없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임한 성부의 진노가 얼마나 살벌했던지, 그분조차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하나님, 그분이 십자가에서 절규 가운데 피 뿌려 죽지 않고는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을 길은 없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눅 9:23).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는 자리다. 내 뜻대로 살려고 하는 ‘나’, 왕이고자 하는 ‘내’가 못 박혀야 할 자리가 십자가다. 우리의 왕이신 주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즉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못 박혀야 할 십자가에 우리 왕이신 예수님을 못 박으려고 한다. 빌라도는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물어보았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인 빌라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준엄하게 물어보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준엄하게 물어보고 계신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자리, 내가 죽는 그 자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으로 임재하시는 자리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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