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 평범 속에서 찾는 의미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 묵상 <161> 평범 속에서 찾는 의미

일요시사 0 12796
법원에서 죄수에게 형을 선고할 때는 죄인의 이름과 죄명을 밝힌다. 예를 들어서 누구누구는 살인죄로 무기징역에 처한다 하는 식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십자가에 죄수를 처형할 때는 죄수의 이름과 죄명을 패에 적어 붙이는 것이 관례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십자가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가 붙어 있었는데, 이는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의 이름은 ‘나사렛 예수’이고, 그의 죄명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뜻이다. 

나사렛 예수는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뜻으로 예수를 부를 때 흔히 쓰던 표현이었다. 빌라도는 당시의 관례에 따라 예수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고,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가장 비천한 자리로 찾아오셨으며,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주시고, 모든 이들을 품으시며 고난 당하신 ‘나사렛 예수’라는 깊은 뜻이 있었다. 물론 빌라도나 유대인들이 이런 뜻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은 경우가 다르다. 이는 ‘나사렛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처형되는 것이며, 로마총독 빌라도에 의해서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되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유대인의 왕’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은 대제사장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표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자 빌라도가 말한다. “내가 쓸 것을 썼노라”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가 스스로 ‘유대인의 왕’임을 자처하며 민란을 일으키려 하니 이 자를 반드시 십자가에 처형하여야 합니다” 하는 뜻으로 예수를 고발했었다. 그들은 예수를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인간이라고 고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는 여러 차례의 심문을 통해서도 예수에게서 어떤 죄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 사람이야말로 유대인들의 진정한 정신적 지도자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해주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지만,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자를 놓아주면 로마황제에 대해 반역하는 것이라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협박에 굴복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었다. 빌라도는 총독으로서 말할 수 없는 굴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더 이상 그들의 요구대로 할 수는 없는 터,,, “내가 쓸 것을 썼노라” 그가 쓴 것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었다.

이런 빌라도의 행동을 통해서 예수의 죄목은 공식적으로 ‘유대인의 왕’, 즉 ‘메시아’로 선포가 된 것이다. 결국 나사렛 예수는 메시아라는 죄목으로,, 메시아였기에 십자가에 달린 것이다. 빌라도가 마지 못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일이나, 이 때 붙여진 공식죄목이 메시아를 상징하는 ‘유대인의 왕’이었다는 사실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임을 보여주고 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나님께서 이방인인 빌라도를 통해서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하신 것이다. 

죄수의 이름과 죄목을 패에 적는 것은 당시의 관례대로 된, 겉으로 보면 지극히 평범한 일이었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이렇게 평범한 일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놀라운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십자가의 팻말은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 세 나라 말로 기록되었다. 히브리 말은 유대인들이 쓰던 말이었고, 로마 말은 로마의 국어였으며, 헬라 말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공통적으로 쓰던 세계공용어였다. 십자가에 붙이던 죄수의 팻말을 이렇게 세 나라 말로 기록함으로써, 세상사람 누구나 다 알아볼 수 있도록 한 것도 역시 당시의 관례에 따라 한 일이었다. 

그러나 팻말이 세 나라의 말로 쓰여진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로마인이나 헬라인이나 할 것 없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메시아이심을 공표하는 사건이었다. 나사렛 예수는 유대인의 왕일 뿐만 아니라, 세계 만방의 왕이신 인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당시에 관습대로 행해지고 있던 일을 통해서 선포하신 것이다. 

또 로마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으로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인들이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고 하였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의 옷을 처형을 집행한 사람들이 전리품으로 갖도록 하는 것도 역시 당시의 관습이었다. 

죽을 사람이 입었던 옷이 얼마나 가치가 있어서 전리품으로 갖게 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어쩌면 가족들이 이 세상 마지막 가는 길에 가장 좋은 옷을 입혀서 보냈을 수도 있고, 사형수들이 입고 있던 옷을 가지면 전쟁터에서 죽지 않는다든가 하는 행운이 따른다는 미신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시편 22편 18절 말씀의 성취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성경의 예언대로 로마군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고, 속옷은 제비를 뽑았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도 겉으로 보면 모든 것이 관례대로 평범하게 진행된 일이었다. 골고다 언덕에서는 예수 외에도 수많은 죄수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어갔지만, 모두가 다 고통과 절망과 죽음의 십자가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린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고난이었고, 희망과 생명의 십자가였다.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관례와 관습에 따라 진행된 평범한 일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하나님의 일이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는 평범한 일들도 헛된 일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일이 될 수도 있다. 일상의 삶도, 교회의 일도, 고난과 기쁨도 이와 같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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