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세메스로 올라가는 신앙, 삼상 6장7-12절

기독교


 

벧세메스로 올라가는 신앙, 삼상 6장7-12절

NZ광림교회 0 2357

 본문에는 우리에게 아주 귀한 영적인 은혜와 교훈을 주는 동물이 나옵니다. 바로 암소인데, 일명 벧세메스로 올라갔던 암소들입니다. 먼저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스라엘에는 자신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성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법궤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 돌 판이 들어 있는 나무 궤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이동할 때 법궤를 중심으로 이동했고 범람하는 요단을 건널 때도 법궤를 메고 들어갔을 때 요단 물이 갈라졌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법궤를 그만, 사울 왕 때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 땅에 들어간 날부터 이 블레셋에 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다곤 신전에 법궤를 두었는데 아침에 보니 다곤이 하나님의 법궤 앞에 쓰러져 있는 것입니다. 다시 일으켜 세워놓고 다음날 아침에 보니까 이번에는 쓰러진 것뿐만 아니라 다곤 신의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몸뚱이만 굴러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가는 블레셋 지역마다 아주 끔찍한 독종이 퍼져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블레셋 지역들이 초토화 되는 것입니다. 더 기막힌 노릇은 독종 때문에 법궤를 옮기면 옮기는 곳에 또 독종이 퍼지고 옮기면 또 그 지역에 독종이 퍼졌습니다. 블레셋이 7개월이나 그 곤욕을 치렀습니다. 결국 블레셋이 내린 결정은 이 무서운 법궤를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법궤를 이스라엘 진영으로 보낼 때 이스라엘과 가장 가까운 블레셋 국경 지역인 벧세메스였습니다. 그때 그 법궤를 수레에 싣고 올라간 짐승이 바로 암소들입니다. 이 암소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신앙의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벧세메스로 올라가는 신앙은 어떤 신앙인지 3가지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1. 벧세메스의 신앙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주님을 따르는 신앙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때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과연, 그간에 블레셋에 임한 재앙이 이 법궤 때문에 온 것인지, 다시 말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이 모든 재앙이 온 것인지알고 싶었습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이들은 법궤를 끄는 소를 택할 때 아주 특별한 조건을 세웁니다.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7) 블레셋 사람들이 택한 소는 한 번도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였습니다. 이 소들은 수레를 끌기에 최악의 조건을 가진 소입니다. 다시 말해, 절대로 수레를 끌 수 없는 소입니다. 이 소들은 멍에를 메어 본적이 없습니다. 힘이 센 황소가 아닌 암소입니다. 집에 새끼를 두고 온 소들입니다. 왜 블레셋 사람들은 절대로 수레를 끌 수 없고, 움직일 수 없는 소들을 택했을까요? 이 암소들이 움직여서 수레를 끌고 앞으로 간다고 하는 건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은 초월적인 힘이 아니고서는 절대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소가 움직여서 수레를 끌고 이스라엘 쪽으로 간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인 것을 알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벧세메스로 올라간 암소들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를 의미입니다. 암소들이 법궤를 메고 저 벧세메스로 향해 간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법궤를 멘 자들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세상 죄를 메고, 세상의 짐을 메고 살았지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 말씀을 메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오늘 암소들은 수레를 끌고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암소들이 움직였습니다. 저 벧세메스로 나아갔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믿고 따르지만 우리의 상황도, 어떤 때는 주님을 믿을 상황이 아닙니다. 나의 처지와 형편을 돌아보면 주님을 따를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믿어지고 주님이 따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것은 내가 믿는 게 아닙니다. 믿게 하시니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상황이 도저히 믿음을 갖기 어렵고 아무리 봐도 주님을 따르기 어려운 때입니까? 오늘 벧세메스의 암소들을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 암소들은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상황을 보고 믿음을 포기하지 말고 믿음으로 상황을 변화시키는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벧세메스의 신앙은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손에 이끌림을 받는 신앙입니다.

 본문의 암소들은 과연 하나님의 궤를 싣고 벧세메스로 올라갔을까요? 본문 12절에 그 답이 나옵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말씀에 보면, 암소들은...가며...울었습니다.

1) 암소들이 왜 울었을까요? 젖 나는 어미 소가 젖먹이 새끼들을 두고 떠나려니까 울음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궤를 싣고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부여잡고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찬송 가사처럼 기쁘고 즐거운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말씀을 지키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다가 보면 큰 슬픔이 동반되고 아픔이 따를 수 있습니다. 벧세메스로 올라간 암소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음메, 음메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상황인데, 하나님 말씀을 따르려고 하니까 하나님~, 하나님~” 울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참되게 따르는 삶에는 슬픔과 아픔과 고통이 따릅니다.

2) 암소들이 울면서도 벧세메스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들은 새끼 송아지에게 끌리는 모성적 본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성 본능보다 더 강력한 끌림이 있었는데, 바로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손에 이끌림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이 믿음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세상에 끌릴 때가 많습니다. 신자도 인간인지라 본능에 끌리고, 인정에 끌리고, 감정에 싸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참 믿음의 사람은 세상이 나를 끄는 힘보다, 본능이 나를 지배함보다 더 강력하고 더 거룩한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배입니다.

3. 좌우로 치우침 없이 벧세메스 길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12절에 보면, 이 소들이 벧세메스로 올라갈 때 정말 신기한 광경이 벌어집니다. 이 소들은 멍에를 메어 본적이 없습니다. 힘이 센 황소도 아닙니다. 집에 새끼를 두고 온 소들입니다. 그 가는 것이 비틀거릴 만도 하고 이리저리 곁길로 갈만도 합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12) 먼저 대로로 가는 것입니다. ‘대로로 가는것은 단 하나의 큰 길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암소들은 이길 저길 기웃거리지 않고 단 하나의 길로 행했습니다. 신앙의 삶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단 하나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말씀하셨으면 거기에서 곁가지를 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자꾸 내 생각을 섞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좌우로 치우치지않는 것입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은 어느 한 쪽으로 쏠리거나 곁길로 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좌우치지 않는 신앙을 위해서는 분명하고 바른 목표가 중요합니다. 오늘 암소들은 비록 짐승이고 미물이지만 벧세메스라는 목표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며, 벧세메스라는 목표를 향해 굳게 나아간 소들처럼 하나님을 향해 굳게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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