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 마 21:1-11

기독교


 

내 마음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 마 21:1-11

NZ광림교회 0 2058

 아프리카의 성자인 슈바이처가 선교와 구제에 힘쓰다가 노벨상 시상식에 참여하기 위해 고향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기차역에서 그를 기다렸습니다. 기차가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1등 칸으로 몰려갔습니다. 그러나 손님이 다 내리기까지 박사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 2등 칸에 타고 왔나 싶어 2등 칸으로 몰려갔지만 거기에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할 때, 3등 칸에서 슈바이처 박사가 내렸습니다. 사람들이 슈바이처에게 몰려가서 1등 칸을 타고 오시지, 3등 칸을 타고 오셨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슈바이처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4등 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내용입니다. 3등 칸을 탄 슈바이처처럼, 예수님도 군마가 아니라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입성은 세 번의 입성이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신 입성입니다. 2천 년 전, 저 유대 땅 베들레헴 마구간에 한 아기로 입성하셨습니다.

2) 두 번째는 본문의 입성입니다. 당시 유대 백성들은 예수님에 대해 열광했고 예수님이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구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 때 새로운 왕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입성 위용 있는 군마가 아닌,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을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3) 세 번째는,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는 입성입니다. 예수님의 입성은 2천 년 전, 예루살렘 입성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의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지금 들어오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 미움과 증오와 죄악이 가득한 예루살렘 성에 참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입성하신 것처럼 우리들의 마음에도 참 평화를 주기를 원하셔서 오십니다. 우리가 참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평화의 주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주님이 정말 내 마음의 구주가 되시면 거기에 참 평화가 있습니다. 내 마음의 예루살렘에 주님이 입성하시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3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언약 위에 굳게 서서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들어가실 때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차마 그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기다리는 성을 어떻게 태연하게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에 의지하여... 언약에 의지하여... 약속에 의지하여 들어가셨습니다. 아무리 가기 힘든 길도 말씀이 있으면 가는 겁니다. 아무리 고난의 길도 약속이 있으면 가는 겁니다. 말씀 위에 굳게 서서 갈 때, 우리에게 힘이 주어집니다. 본문 2-3절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건너 마을에 가서 나귀를 데려오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건너 마을에 가면 나귀 새끼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귀를 풀어 끌고 올 때 누가 뭐라고 하면 주가 쓰시겠다 하면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가서 보니까 예수님 말씀이 다 맞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절대적인 확신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말씀에 의지하여, 약속에 의지하여 담대하게 들어가셨습니다. 우리도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약속 붙들고 십자가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인 것이 믿어지는 인생은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아무리 장애물이 앞길을 막아도 주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2. 내 마음의 겉옷을 펴서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들어가실 때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 깔아드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왕이나 개선장군이 가는 길에 레드카펫을 까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심령에도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맞이하며 자기의 겉옷을 깔아드린 사람들처럼 우리도 심령의 겉옷이 깔아 드려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겉옷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겉옷은 몸의 가장 바깥에 걸치는 옷인 동시에 덮는 옷입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의 겉옷은 낮에는 뜨거운 더위를 막아주는 동시에, 기온이 심하게 떨어지는 밤에는 그걸 덮고 자야 하는 슬리핑백의 역할입니다. 천이 귀하고 옷이 단벌인 그들에게 겉옷은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다급한 순간에 집에 들어가 귀중품을 챙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겉옷을 챙깁니다. 출애굽기 22장에 보면, 유대인들은 이 겉옷을 전당 잡혀서 돈을 빌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겉옷을 전당잡은 사람은 해가 질 때 그 겉옷을 돌려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겉옷이 없으면 밤에 고생하고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겉옷은 유대인들에게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겉옷이 갖는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겉옷이 몸의 가장 바깥에 입는 옷인 것처럼 우리 심령의 겉옷은 나에게 마지막 남은 최후의 자존심을 의미합니다. 또한 나에게 있어서 다른 건 다 포기해도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가지고 예수님의 길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겉옷을 펴서 주님의 가시는 길을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 심령에 들어오시기 위해서 자기의 겉옷을 벗어야 합니다.

3. 예수님을 내 마음의 왕으로 모셔 들이라.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들어가실 때 사람들은 겉옷을 깔아 드린 것과 함께 또 하나 중요한 행동을 합니다. 본문 8절을 보면,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베어서 길에 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이 나뭇가지는 종려나무 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호했습니다. 이것은 왕을 맞이할 때 하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9절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하고 찬송했습니다. 본문에서 유대백성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셔 들이고, 왕으로 높여 드렸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나의 삶에, 우리 가정과 교회에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 삶의 왕으로 모셔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왕이 되실 때 내 삶에 비로소 참 평화와 구원이 임하고, 예수님이 나의 왕이 되실 때 신앙이 바른 신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왜 변질되고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까? 왕이신 예수님이 아닌 자신이 왕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어리석은 교만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의 왕이신데 어느 샌가 자신이 왕이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왕이 되어 내 삶을 좌지우지 합니다. 이것이 잘못된 신앙의 출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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