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이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막 9:35-37, 10:13-16

기독교


 

어린 아이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막 9:35-37, 10:13-16

NZ광림교회 0 3543

 로마의 유명한 정치가의 아내였던 코넬리아라는 여인은 남편을 일찍 여의고 혼자서 자녀들을 키웠습니다. 그녀를 안타깝게 여긴 주위 친구들이 한 달에 한번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하루는 대화 중 다이아몬드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각자 다이아몬드를 자랑하던 친구들이 그녀에게 다이아몬드가 몇 개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말없이 밖으로 나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데리고 들어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에게는 이 아이들이 저의 보화입니다. 이 아이들이야말로 우리 가정의 가장 귀한 보화입니다.” 이처럼 자녀들을 보물처럼 여기고 교육에 가장 정성을 기울이는 부모들은 한국의 부모들일 것입니다. 한국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 투자하고 희생하는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런 우리나라에서 최근 두드러진 사회 문제 중에 하나가 아동 학대입니다. 흔히 뉴스를 통해 보육시설의 아동학대가 보도되지만, 아동학대는 주로 가정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한 통계를 보면 보육시설의 아동학대는 3%이고, 가정에서의 아동 학대는 80%입니다. 아동학대의 가장 큰 이유는 어린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그릇된 인식과 태도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는 힘없고 약하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낳은 자식은 내가 어떻게 하든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그 생명까지도 내가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성경과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어떤 존재라고 말씀하시는지, 우리가 어린 자녀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또한 어린 아이들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나누기 원합니다.

1. 어린 아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본문 막 1013절을 보면, 하루는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왔는데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13) “만져주심을 바라고는 예수님께서 자녀들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께 나온 아이들을 제자들이 막아섭니다. 13절의 제자들이 꾸짖었다라는 구절은 평행본문 마 19, 18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행동은 당시 유대사회의 어린 아이에 대한 생각을 말해줍니다. 고대 사회들의 공통점은 아이들을 경시했고, 귀찮은 존재로 여겼고, 그들을 억눌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헬라 문화권에서는 어린 아이를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또한 유대 문화권에서도 어린아이를 방자하고, 무분별한 존재로 여겼고, 아주 엄격한 교육이 필요한 존재요, 전쟁이나 노역에 별가치가 없는 신분으로 이해했습니다. 현대에도 어린 아이들은 작고 힘이 없기 때문에 경시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셨을까요? 당시의 랍비들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데리고 오면 머리에 안수함으로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랍비들과 다른 특이한 모습 하나를 보여주십니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16) 본문 936절에도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먼저 안으셨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안는다는 것은 그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고 그와 눈높이를 맞추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어른들에게 아이들은 자신들보다 항상 아래 있는 존재였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올려다보았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아이를 품에 안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아이의 눈을 바라보면서 그 아이에게 사랑을 듬뿍 전해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아이들을 바라볼 때 예수님의 시각과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가장 낮고 천하게 여겨지는 아이를 가슴에 안고 가장 친밀하게 그리고 가장 존중히 대했습니다.

2. 축복함으로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는 도화지로 말하면, 아무 것도 그리지 않은 깨끗한 도화지와 같습니다. 그래서 그 위에 부모나 어른들이 무엇을 그려주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집니다. 또한 어린 아이는 무엇을 심든지 잘 자라는 옥토와 같아서 심은 대로 거두는 존재입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거두고 미움을 심으면 미움을 거둡니다.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 할버톤이 하루는 어린 아들과 친구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들의 친구가 "우리 아버지는 이 도시의 시장님과 아주 친하단다."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때 아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래? 우리 아버지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친하단다." 할버톤은 아들의 말을 듣는 순간 감격해 왈칵 눈물을 쏟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어린 아이들의 마음은 백지와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깨끗한 어린 아이들의 마음에 심어줄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축복(Blessing)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 가운데 우리 마음에 새겨할 모습은 어린 아이를 축복하신 모습입니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10:16)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본을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예수님 앞에 왔던 아이들은 떠들기도 하고 장난도 치고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예수님을 피하는 아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린 아이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안으시고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본을 보여주신 이유는 아이들에게 축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축복 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예수님처럼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는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어린 아이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본문 14-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이 말씀이 놀라운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비결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말씀 보니까 어린 아이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 비결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이들을 금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아가서 아이들처럼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 아이에게서 천국 시민의 성품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천국 시민의 성품은 무엇일까요?

 1) 아이들은 순수하여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입니다. 사람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순수함이 사라질수록 상대방을 내 잣대로 판단하고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 아이들에게서 순수한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수용하는 모습입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연약하면 연약한 대로 받아주는 모습니다.

 2) 아이들은 용서의 대가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키우면서 자녀들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많이 준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아이들은 수많은 모진 말들, 깊은 상처들을 다 받고도 어리광을 부리며 부모에게 또 다가옵니다. 부모가 진심어린 마음으로 사과하면, 아이들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 잊고 용서합니다. 그런 면에서 정말 어린 아이는 어른의 스승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서 배울 점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바로 용서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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