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 눈으로 밝은 곳을 보라, 마 6:22-23, 요 9:1-7

기독교

성한 눈으로 밝은 곳을 보라, 마 6:22-23, 요 9:1-7

사람에게는 오감이 있습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다섯 가지 감촉입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게 시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정보를 인식하는 양에 있어 시각이 86%로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영국 일간지에 시력 장애를 가진 한 아기에 관한 감동적인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아기는 선천성 색소 결핍증으로 엄마를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오직 음성과 손길로만 인식했습니다. 하지만 시야를 또렷하게 해주는 특수 안경을 쓰게 되었고 생애 처음 엄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아기가 그렇게 행복하게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보는 것은 인간의 행복을 결정하는데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합니다.

마태복음 6장과 요한복음 9장의 공통적인 이슈는 바로 보는 것입니다. 6장에서 예수님은 눈의 중요성을 말씀하시기를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눈이 성하면, 즉 눈이 좋으면 온 몸이 밝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눈이 나쁘면, 아무리 몸이 건강해도 몸이 어둡다고 했습니다. , “성한 눈을 가진 인생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요9장에서 예수님은 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을 만나셨습니다. 이 맹인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이 사람의 죄 때문인가요?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인가요?” 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하시면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그 눈에 발라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고, 이 맹인은 실로암에서 씻자 밝은 눈이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되려면 성한 눈, 즉 밝은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성한 눈, 밝은 눈을 가진 사람인지 본문을 통해 4가지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하나님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밝은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하는 곳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삶에도 늘 함께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하나님을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한 눈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특히 문제를 만날 때면, 하나님을 찾기 보다는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9장 본문이 이와 같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맹인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런 사람을 저주받은 사람으로 생각되어졌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 된 건 도대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입니까? 그 부모입니까?” 문제의 원인을 묻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을 때 원인만을 따지면 답이 없습니다.

반면 성한 눈을 가지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이 사람의 비참한 문제는 죄뿐만이 아닌 그 누구 때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문제 속에서 원인을 찾을 때 예수님은 문제 속에서 하나님을 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나에게 닥친 이 문제와 시련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문제의 원인을 찾는 육신의 시력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아는 영적인 시력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2. 자기를 볼 줄 아는 인생이 성한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본문 속 등장인물들은 맹인을 보며 타인의 죄를 말하여도 자신들의 죄는 보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진짜 맹인은 날 때부터 맹인된 자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자기를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부족한 게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성미가 급하고 다혈질이었습니다. 게다가 스승을 부인하고 도망친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밤새 그물질 했지만 고기를 못 잡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고,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자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잡혀진 고기 때문에 흥분했을 텐데,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앞에 서 보니 자신의 실체가 보인 것입니다. 이 눈이야 말로 가장 성한 눈이고 예수님이 기뻐하신 눈입니다.

이스라엘 왕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 위대한 것은 자기를 철저하게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데 있습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나서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습니다.” 라며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그 후 평생 자기가 어떤 자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물론 자신을 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은 바로 자신을 볼 줄 아는 삶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문제의 밝은 면을 보는 자가 성한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본문 6절에 맹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내린 처방은 진흙을 이겨 그의 문에 바르는 처방이었습니다. 이것은 맹인의 마음과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맹인은 일생을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눈에 더 갑갑하게 진흙을 발랐으니, 아마 부정적인 사람이었으면 대번에 거부반응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예수님의 이 모든 일을 행하시고, “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되묻거나 따지지 않았습니다. 묵묵하게 말씀하신 그대로 했습니다. 분명 이 소경은 예수님의 하시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문제의 밝은 면을 본 것입니다.

사람이 문제를 맞이할 때, 누구는 문제 때문에 주저앉고 누구는 은혜와 축복을 경험합니다. 그 차이는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문제를 바라볼 때 어떻게든 밝은 면을 보고자 애쓰는 태도에 달렸습니다. 문제를 바라볼 때 밝은 면을 보는 성한 눈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4. 미움을 벗어나 사랑에 거해야 밝은 눈이 됩니다.

본문에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보다 훨씬 더 심각한 소경들이 나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소경이 나은 것을 보고도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허물은 못 보면서 타인의 허물만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영적으로 완전히 소경된 자들이었습니다. 미움과 증오에 사로잡혀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미움과 증오가 있다는 것은 사랑과 긍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영적인 소경으로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긍휼, 자비와 관용이 없을 때 영적인 소경이됩니다. 요한1210-11절은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라고 말합니다. 미움에 사로잡혀 영적 소경으로 살아가지 마시고 사랑과 긍휼로 영적으로 밝은 눈으로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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