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쓴 물과 십자가(출 15:22-25)
성경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고 극적인 장면이 있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장면입니다. 애굽을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바로의 군사들이 쫓아오는 진퇴양난의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선포합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오늘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그리고 지팡이를 홍해에 내밀자 바닷물이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이 없다고,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의 믿음을 보시고 바다에 길을 여셨습니다. 홍해를 통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두 눈으로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지, 얼마나 강하신 분인지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 홍해를 건넌 직후의 일입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함께 3가지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홍해 후에 만나는 광야와 마라의 쓴 물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에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은 광야였습니다. 그 광야는 수르 광야로 사래의 여종 하갈이 사래를 피해 도망가서 인생의 쓴 맛을 경험한 장소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에서 광야로 인도했습니다(22절). 홍해가 기쁨과 승리의 장소라면 광야는 정반대의 장소입니다. 환희와 감격도 잠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들은 사흘 길을 걸었지만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22절). 아마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고 모든것이 탄탄대로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그들은 샘이 있는 한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갈증으로 괴로웠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우 반가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물은 너무 써서 마실 수가 없는 물이었습니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23절)” 마라의 뜻은 “쓴, 괴로운, 모진, 고통”입니다. 그만큼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고통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때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승리와 기적을 경험합니다. 뭐든지 다 잘 될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광야를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광야의 쓴 물을 들이켜 괴로워 어쩔 줄 몰라 합니다. 홍해를 건넌 직후 광야를 만났고 3일 만에 마라의 쓴 물을 만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물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광야와 마라의 쓴 물을 피하게 하실 수 있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그걸 겪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시기에 모세를 보내셨고, 사랑하시기에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이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광야를 주신 것도 사랑하시기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홍해의 기적에서만 발견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광야의 고통 역시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에 주시는 것임을 믿어야합니다.
2. 광야의 쓴 물을 만날 때 하나님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마라의 쓴 물을 만날 때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원망이었습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24절)” 이때부터 그들은 문제만 생기면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모세를 원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하나님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면, 마라의 쓴 물을 경험하고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불필요하게 모세를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도 광야를 지나고 마라의 쓴물을 만날 때 이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해야합니다. 사람 때문에 웃고 우는 신앙이 되면 안 됩니다. 사람은 본질적인 해결자가 못 됩니다. 다만 하나님을 보는 신앙이 되어야합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요셉이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 하나님께서 주신 꿈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의 노예로 팔려갑니다. 인생의 큰 상처로 매일 밤을 눈물로 지냈을 것입니다. 쓰디쓴 마라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해석하는 능력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총리가 된 후 기근이 들어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형들이 곡식을 사러 애굽에 찾아왔습니다. 요셉이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기에 좋은 타이밍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형들을 만나자 그들의 동생 요셉임을 밝힙니다. 형들에게 두려워말라며 안심을 시킵니다. 소리를 지르고 심문을 해도 모자랄 판에 형들을 위로한 요셉입니다. 광야의 마라를 경험하고서도 그는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창45:8)” 요셉은 인생의 무서운 광야 속에서, 쓰디쓴 마라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놓지 않았습니다.
3. 십자가가 인생의 쓴 물을 단물이 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놓쳤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25절)” 그는 당장 물이 써서 하나님을 부르짖은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부르짖은 모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25절)” 마라의 물이 써서 먹을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물에 넣었더니 물이 달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의 저자는 다른 나무가 나올 때 이름을 밝히는데, 이 나무에 대해서는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무려 2백만명을 살린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한 나무라고만 언급합니다.
이 한 나무란 도대체 어떤 나무를 가리킬까요?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졌고, 그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라의 쓴 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한 나무를 주셨듯이 오늘 인생의 쓰디쓴 죄악의 고통으로 죽어가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서 한 나무를 주셨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인생에서 광야를 맞이하고 마라의 쓴 물을 경험할 때는 다른 때가 아닙니다. 그 때는 십자가를 생각할 때입니다. 지금 고통 중에 있다면, 마라의 쓴 물을 경험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