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노란 손수건 (눅 15:11-24)

기독교


 

하나님의 노란 손수건 (눅 15:11-24)

 

미국 뉴욕에서 한 버스가 출발하여 플로리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 버스에는 여행을 즐기는 세 쌍의 젊은 남녀와 수염이 덥수룩한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젊은 승객들은 특이한 행색을 한 남자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말을 붙이면서 대화가 시작되었고, 남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4년간 감옥에 있다가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감옥에서 그는 두 번의 편지를 썼습니다. 처음 편지는 죄를 지어 오랫동안 집에 갈 수 없으니 자신을 기다릴 수 없다면 재혼을 해도 좋고 답장이 없어도 좋다고 썼습니다. 부인으로부터 답장을 기다렸지만 답장은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 두 번째 편지를 썼습니다. 이번에는 석방이 되어 집으로 돌아갈 때 자신을 용서한다면 마을 어귀의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 하나를 달아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만약 노란 손수건이 없으면 버스를 타고 그냥 지나가겠다고 했습니다. 승객들은 그의 이야기에 술렁이기 시작했고 남자의 고향이 가까워 오면서 함께 가슴을 졸였습니다. 버스가 남자의 고향에 들어서자 정작 남자는 창밖도 내다보지 못했는데, 승객들은 참나무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승객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창밖의 참나무에 무려 100여 개나 되는 노란 손수건이 걸려있고 그 옆에 남자의 아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노란 손수건은 집을 나간 가족이 돌아오길 바라고 기다리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란 손수건이 수천 년 동안 달려서 나부낀 곳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책입니다. 그 중 누가복음 15장은 온통 하나님의 노란 손수건으로 뒤덮여있습니다. 15장 탕자의 비유 속에서 하나님은 유산을 먼저 받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주는 아버지를 통해 그 분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영혼이 돌아올 때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우리에게 노란 손수건을 펄럭거려주십니다. 함께 3가지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을 떠남에 있습니다.

우리는 탕자의 모습에서 인간불행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삶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13)” 인생의 목적도 방향도 없이 몸이 가는데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재산을 탕진하였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많은 재산을 주었는데도,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어야하는 비참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탕자가 이토록 불행한 인생이 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불행해지는 이유는 하나님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살아가도록 지어진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살려고 하니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천국이요 복된 삶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께 돌아가면 살 길이 열립니다.

탕자는 허랑방탕하다가 재산을 다 탕진하여 돼지만도 못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살 길이 막막해진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흑인영가의 가사 비록 얽매였으나 나는 이제 돌아 가리 자유 주시는 내 주님께처럼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감이 그가 살 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께 돌아가면 살 길이 열립니다. 이 돌아감을 위해서는 세 가지 단계가 필요합니다.

 

1) 돌아감을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자각입니다.

미국에 방탕하게 살기로 작정한 두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도박장으로 가던 중 교회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입구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설교제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한 친구가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교회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자고 제안했습니다. 다른 친구는 그 제안을 거절했고 도박장으로 갔습니다. 훗날 깨닫고 교회로 간 청년은 미국 24대 대통령 클리블랜드가 되었고, 도박장으로 향했던 친구는 감옥의 사형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론 잘못된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자각이 필요합니다. ‘내 삶이 지금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를 깨달아야 합니다.

 

2) 돌아감을 위한 두 번째 단계는 죄에 대한 인정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탕자를 잘 생각해보면 법적으로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정당하게 자기가 받을 재산을 받았고 그것을 자기 맘대로 썼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18)” 그는 법적으로는 죄가 없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돌아갈 때 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3) 돌아감의 세 번째 단계는 실행에 옮기는 것입니다.

탕자가 자각하고 죄에 대한 인정을 했어도 거기에 주저앉았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돌아감이 아닙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20)” 탕자는 돌아감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죄를 깨달았으면 다음에는 결단하고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3. 돌아온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받아 들여야 합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환대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특히 아들이 집으로 걸어올 때 아들이 아버지를 알아 본 게 아니고,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버지가 날마다 아들을 기다린 것입니다. 유대인의 풍습에서 아버지가 발을 보이며 뛰는 것은 수치인데,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뛰어가 목을 안고 울면서 아들을 반겼습니다. 그리고 제일 좋은 옷을 아들에게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겼습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아버지는 집에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 본문을 보다보면 탕자가 너무 염치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품꾼의 하나로도 족하다는 각오를 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온 탕자입니다. 자신의 각오와 달리 너무 큰 아버지의 기쁨에 그는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왜 좀 더 빨리 돌아오지 못했는가 하고 후회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환대해주시는 아버지의 큰 사랑을 알았기에 탕자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있어서 이 세상천지와도 바꿀 수 없는 존재야이 은혜를 받아들이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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