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지 않는 신앙 (왕하 2:8-11)

기독교


 

머물지 않는 신앙 (왕하 2:8-11)

 

성경에는 죽음을 보지 않고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에녹이고, 또 한 사람은 엘리야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5:24)”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하나님이 그를 하늘로 데려가셨습니다. “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왕하2:11)” 엘리야도 마지막에 죽음 대신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와 같은 승천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가장 영광된 최후입니다. 엘리야의 승천은 핍박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완수한 그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엘리야를 기쁘게 보시고 그 마지막을 가장 영광된 최후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엘리야의 후계자인 엘리사를 보고자합니다. 엘리사가 스승 엘리야가 승천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믿음의 자세는 우리에게 너무나 큰 귀감이 됩니다. 함께 3가지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머무는 신앙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회오리 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왕하2:1)” 엘리야가 승천할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최초의 승천 장소는 길갈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곳에 엘리사를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승천 장소를 벧엘로 바꾸십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왕하2:2)” 자신을 따라오는 엘리사에게 엘리야는 너는 여기 머물라라고 말합니다. 그 말에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지 않겠다(왕하2:2)고 답하며 벧엘로 따라갑니다. 벧엘에 이르자 하나님은 또 장소를 여리고로 바꾸십니다. 엘리야는 역시 너는 여기 머물라라고 말하고, 엘리사는 아니요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고 답합니다. ‘이젠 더 이상 장소가 안 바뀌겠지했는데, 하나님은 요단으로 또 한 번 장소를 바꾸십니다. 엘리야는 다시 한 번 너는 여기 머물라라고 엘리사에게 말합니다. 엘리사 입장에서는 세 번이나 장소가 바뀌고 스승님이 계속 너는 여기 머물라하면 머물 만도 합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스승을 떠나지 않겠다(왕하2:6)며 최후까지 그를 좇아갑니다. 그는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으로 엘리야의 승천 장소가 바뀔 때마다 스승의 만류에도 스승을 따랐습니다. 끝까지 동행했고, 끝까지 좇아감으로,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길갈의 단계가 있고, 벧엘의 단계가 있고, 여리고의 단계가 있고, 요단의 단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지금 있는 단계에 머물지 말라고 말합니다. 거기 머물지 말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때로는 머물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순간도 머물면 안 됩니다. 머무는 순간 신앙은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이스라엘에는 두 개의 바다 같은 호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해이고, 다른 하나는 갈릴리 호수입니다. 사해는 바닷물의 염도보다 7배나 높은 염도 대문에 어떤 생물도 생존할 수 없는 바다입니다. 사해가 그렇게 된 연유는 물을 받기만 하고 내어보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물이 흘러가지 못하고 그냥 머물러 있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릴리 호수는 물을 받은 만큼 흘려보내 생명력이 넘칩니다. 오늘 우리 신앙도 내가 받은 은혜, 내가 받은 축복, 내가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는 신앙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은 머물러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2. 나의 신앙을 머물게 하는 것들을 극복하라.

엘리사에게는 길갈에서 벧엘로, 여리고로, 요단으로 나아갈 때마다 그를 머물도록 만드는 장애물들이 많았습니다. 가장 크게는 너는 여기 머물라고 세 번이나 말하는 스승이었습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더 나은 신앙의 단계로 가고자 할 때 우리는 장애물을 만납니다. 삭개오가 그랬습니다. 그는 세리장으로 죄인 중의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키가 너무 작아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 나은 신앙으로 나아가고자 했는데 장애물을 마주친 것입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예수님 보기를 포기하지 않고, 장애물을 극복했습니다.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 삭개오의 그 열정을 보시고 예수님은 죄인으로 여겨지던 삭개오의 집에 유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의 단계를 올라가고자 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럴 때 나무에 올라갔던 삭개오와 같은 탁월한 열심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문학작가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독실한 크리스천인 어머니를 둔 작가였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만날 때마다 예수 잘 믿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헤밍웨이는 저는 예수도 믿고 하나님도 믿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만 하세요. 그런데 제가 예수 믿는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마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실상 그는 교회를 나가지도 않고 하나님을 떠나 살았습니다. 노벨상도 받고 세계적인 부자도 되었지만 심령이 공허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나는 전지약이 다 떨어지고 코드를 꽂으려 해도 전원이 없어 불이 들어오지 않는 라디오의 진공관처럼 공허 가운데 외롭게 살고 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살했습니다. 어머니가 거듭 충고할 때마다 입으로는 나는 예수도 믿고 하나님도 믿는다고 했지만,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예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교만이었습니다. 결국 교만을 극복하지 못한 그는 비참한 인생의 종국을 맞이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나의 신앙을 더 오르지 못하게 하고 머물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3. 가장 좋은 것을 구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요단에 도착한 엘리야는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쳐 갈라지게 하여 마른 땅 위를 건넜습니다(왕하2:8).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할 때가 되자, 엘리사에게 내가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가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라고 물었습니다. 이제 엘리야가 올라갈텐데, 그 전에 무엇을 해 줄지 구하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엘리사는 이 순간을 위래서 저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까지 스승을 떠나지 않고 열심히 좇아왔을 것입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왕하2:9)” 고생 끝에 엘리사는 가장 좋은 것을 구했습니다. 이러한 엘리사의 간구에는 엘리야의 모든 역사가 인간의 능력이 아닌 성령이 하시는 역사(왕하2:9)라는 고백이 드러납니다. 성령의 역사를 보여준 엘리야처럼 엘리사도 다른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구했습니다.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닌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이 기도를 들은 엘리야는 너무도 위대한 것을 구하니까 어려운 일을 구한다(왕하2:10)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사의 기도를 너무도 기뻐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엘리사가 주워 가지고 물을 치니까 엘리야가 쳤을 때와 똑같이 물이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이와 같은 간구와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감동하시는 기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귀한 것을 구하는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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