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원병의 아침 묵상 155 ] 사랑은 믿음의 얼굴

기독교


 

[ 채원병의 아침 묵상 155 ] 사랑은 믿음의 얼굴

일요시사 0 1048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깨닫고, 참으로 자신의 것으로 누리며, 베풀며 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게 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랑을 배워가게 된다. 참으로 나는 작아지고,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신 예수 그리도가 크게 자리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깨닫는다는 것은 지식의 문제를 넘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온 영혼으로 깨닫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하나님이시다. 십자가의 달리신 하나님,,, 그분을 골로새서 1 6절은 이렇게 묘사한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천상천하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그런데 그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 마음과 영혼 깊숙이 찾아 든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함께 찾아 든다. 우리는 그 은혜와 사랑 안에서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상담가 데이빗 시멘즈는 자신의 상담경험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래 전에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대부분의 정서문제의 주요 원인은 다음 두 가지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용서를 깨닫고 받아들이지 못하며, 누리지 못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무조건적인 사랑, 용서,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훌륭한 은혜의 신학을 읽고 듣고 믿는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 은혜의 복음이 정서의 차원까지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값 싼 은혜로 전락하고 있다. 그저 값없이 구원받았다는 차원으로, 또는 나를 한없이 용서하시는 은혜의 차원으로 전락하고 있다. 또는 내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정도로 치부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시멘즈의 지적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깨닫고 누리며 살지 못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깨닫는다면, 용서와 사랑의 자리로 나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상실감이나 파괴된 자존감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깊고 깊은 어둠의 상자 안에 갇혀,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는 자가 된 적이 있는가... 절망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오랜 가뭄으로 메마른 땅 위에 임하는 단비와 같고, 어둠의 감옥 속에 비치는 밤하늘의 달빛과 같고 별빛과 같다. 어둠의 상자 뚜껑이 살며시 열리면, 하나님의 은혜는 밤하늘의 별빛이 되어 어둠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러나 은혜의 시간은 짧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뚜껑을 닫으신다. 내 영혼은 다시 어둠의 깊은 고독 속에서 상실감에 빠진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시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해주셨다. 그러나,, 그 어둠의 상자 안에 갇혀있는 시간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깨닫는 과정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은 어둠 속에서도 나를 붙들고 계셨고,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는 어둠 속에서 더욱 강하게 역사하고 계셨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 안에서만 숨을 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슴 깊이 담고 사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무엇인가?

 

갈라디아서 5 6절은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5:6의 말씀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이다. 믿음은 사랑을 통해 일하며, 사랑을 통해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난다

 

그런데 형제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는 적극적인 사랑은 고사하고, 우리는 용서조차도 쉽게 하지 못한다.우리는 용서에 대해 수없이 말씀을 들어도, 쉽게 용서하지 못하며, 쉽게 용서받지도 못한다. 용서란 언제나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6:12)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에서 이 구절은 섬뜩한 내용을 담고 있다. 찰스 윌리엄스는 이 구절의같이라는 짧은 단어보다 무서운 말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 이 말이 그렇게 무서운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받는 용서와 남에게 베푸는 용서를 명백하게 하나로 묶어 두셨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마 6:15의 말씀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용서는 의무가 아니다. 의무보다 우선되는 것이다. 믿음의 또 다른 얼굴이다. 마음의 믿음이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믿음의 얼굴이다. 믿음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맡기는 것이다. 용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행위다. 12:19은 말한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하나님께서 대신 원수를 갚아주시기를 바라라는 뜻이 아니다. 모든 것을 헤아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용서하라는 뜻이다.

 

용서와 사랑은 믿음의 얼굴이며, 주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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