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원병의 아침 묵상 158 ] 그리스도인의 승리,,,

기독교


 

[ 채원병의 아침 묵상 158 ] 그리스도인의 승리,,,

일요시사 0 1054

 

 

종려나무,,, 뉴질랜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palm tree. 종려나무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상징한다. 그래서 당시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사건을 가리켜서 Triumphal Entry ‘승리의 입성이라고도 하며, 이 날을 교회는 종려주일로 지키고 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은 유월절 닷새 전인 일요일이었다. 주님께서는 유월절인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므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십자가를 향한 지상에서의 마지막 여정이었던 것이다. 주님의 마지막 여정은 이 땅에서 지내신 30여 년 동안에 가장 힘들고, 길고, 고독한 마지막 닷새 간의 여행이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마지막 그 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무리는호산나외치며 열렬히 주님을 환영했다. 그러나 주님께서 지상에서 걸어가신 마지막 길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리는호산나외치며 주님을 영접했지만, 그들의 외침은 불과 닷새 후면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함성으로 변하게 된다.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그들에게 있어서구원이란 무엇이었을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주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던 무리와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도시락 안에 있던 작은 빵 다섯 덩어리와 생선 두 마리로 성인 남자만 오천 명, 남녀노소 합하면 약 2만 명이나 되는 무리를 배불리 먹게 하고도,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이런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라면 당연히 왕으로 모시고, 주님으로 섬길 수가 있다. 이런 주님이라면, 진정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을 것이다. 삶의 고난과 역경과 억압과 가난에서 구원하시고, 풍요와 기쁨으로 충만한 삶도 주실 수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을 환영하며, ‘호산나외치던 무리도 같은 심정이었다. 기복주의 신앙에 젖어있는 기독교인들도 어쩌면 이들과 비슷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고 있는 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참된 승리란 무엇일까,,,

 

먼저 주님께서 왜 하늘에서 이 땅에 찾아오셨는지를 생각해보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그가 없이는 된 것이 하나도 없으며( 1:3),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1:16).

 

천상천하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주권자이시며, 만물이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하늘의 영광을 누리며 계시던 그분께서 왜 이 땅에 찾아오셨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참된 승리란 무엇인지도 깨달을 수 있다.

 

하늘 하나님께서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찾아오신 것은 그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오직 이 목적을 위해서 하늘의 모든 영광을 뒤로 하고 이 땅에 찾아오셨으며, 골고다 언덕을 향해 걸어가신 것이다.

 

구원의 영광,,, 그리스도의 승리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승리이며,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그리스도인들의 승리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생이라는 영광의 나라가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구원의 영광과 승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 이사야서 35 1, 2절은 주와 함께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렇게 노래한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광야와 같고, 메마른 땅과 같이 삭막했던 우리의 마음과 삶이 백합화 같이 피어나며, 인생의 즐거움을 찾게 되고, 기쁜 노래를 부르게 된다. 호산나,,,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기 실존에 대한 자각이며, 주 안에서 잃어버린 삶을 되찾은 자의 기쁨의 환호인 것이다. 그 때 그들은 여호와의 영광, 즉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골고다를 향해 걸어가신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의 영광이며, 주님의 사랑의 아름다움이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마지막 닷새 동안의 여행길은 지상사역 중에서도 가장 고독하고 힘든 고난의 길이셨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셨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하늘의 모든 영광조차도 포기하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이겨내실 수 있었던 것이다.

 

십자가의 승리는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의 승리다. 그러나,,, 골고다 언덕, 십자가의 자리는 주님에게도 가장 힘든 자리였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간절한 기도를 세 번씩이나 하셨던 것이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26:39)

 

누가복음 22 43-44절은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땀이 땅에 떨어지는 데 핏방울같이 되었다,,, 땀에 피가 밸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기도하신 것이다. 그 땀과 피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흘리신 주님의 사랑의 땀과 피였다.

 

주님의 최후의 승리는 십자가의 승리다. 그 최후의 승리는 겟세마네에서 땀에 피가 배어나는 기도, 바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의 승리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승리,,,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오병이어의 축복도 아니고, 주님 달리신 십자가를 바라만 보는 것도 아니다. 로마서 6 3절은 말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그리스도인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자들이며, 주님과 함께 죽은 자들이다. 십자가를 바라만 보며, ‘호산나외치며, 구원의 영광을 찬양만 하는 자가 아니다. 십자가의 자리, 그 사랑의 자리에 주님과 함께 참여하는 자들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2:20)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이며, 자신은 죽고 주님께서 진정한 주인으로서 마음 중심에 살아계신 자들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9:23) 그리스도인들이 져야 할 십자가는 자기부인의 십자가이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십자가다. 내가 죽고, 내가 부인될 때, 십자가의 자리, 참 사랑의 자리로 나갈 수 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자리에 가시기 전에 먼저 겟세마네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를 하셨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겟세마네의 기도는 자기부인의 기도였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승리는 자기가 부인되는 십자가의 자리에 있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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