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뜻하신 곳에 있는 인생 (창 12:10-20)

기독교


 

하나님이 뜻하신 곳에 있는 인생 (창 12:10-20)

 

성경에 보면 자리신앙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최초로 던진 질문도 네가 어디 있느냐?”입니다. 이 질문은 영적인 자리를 묻는 질문입니다.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의 뜻은 과녁을 벗어나다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있어야할 가나안 땅을 떠났습니다. 본문은 그 후에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뜻하신 곳에 있는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길 원합니다.

 

1. 약속의 땅 가나안에도 기근이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거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도해주신 그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12:10). 다른 땅도 아니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라면 기근도 없고 홍수도 없어야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그러한 시련을 주셨을까 의문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브라함의 참 믿음을 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참 믿음을 보기를 원하셨던 하나님과 다르게 아브라함은 기근이 오자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저버렸습니다. 가나안 땅을 등지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훗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토록 원하셨던 참 믿음을 보여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했을 때입니다. 그것은 기근보다 더한 시련이었습니다. 아들을 번제로 드리러 모리아 산으로 올라갈 때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은 매우 흔들렸을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양이 어디 있냐?’는 이삭의 물음 앞에 그만 돌아가자고 대답했다면 또 다시 가나안 땅을 등지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에게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시리라라는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아브라함의 고백을 아들을 번제로 드릴지라도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그를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11:18-19)”라고 말씀합니다. 기근보다 더 혹독한 시련이 다가왔지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때론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도 기근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약속의 땅에 기근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2. 기근이 있더라도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인생의 기근을 피하려고 하나님이 그에게 뜻하신 가나안을 떠났습니다. 가나안을 떠나면 모든 것이 잘 될 줄 알았는데, 애굽에 이르자 생각지 못한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12:11)” 절세 미인이었던 아내 사래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12:12)” 사래가 너무 아리따운 나머지 아브라함은 남편인 자기가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살기 위해 애굽으로 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신변 위협의 문제를 맞닥뜨리게 된 것입니다.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12:13)” 아브라함의 이 말은 다른 말로 당신을 나의 누이라고 한 이상 누가 와서 당신을 데려다가 아내로 살겠다고 해도 나는 상관 않겠소.’ 생사가 걸린 커다란 위협 앞에 이르자, 아브라함은 정신 없는 소리를 했습니다. 자신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비겁해질 대로 비겁해진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애굽에 도착하자 사래의 미모는 곧장 소문이 났습니다. 소문을 듣고 바로의 고관들은 사래를 확인한 뒤, 그녀를 바로의 궁으로 데려갔습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12:14-15)” 이 과정에서 바로의 고관들은 사래와 아브라함의 관계를 물었을 것입니다. 그때 누이라고 대답해야만했던 자신을 바라보며 아브라함은 아마도 차라리 가나안을 떠나지 말걸... 내가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라며 땅을 쳤을 것입니다.

사래의 미모가 흡족하여 바로는 아브라함에게 어마어마한 선물을 보냈습니다. 선물을 받았음에도 그는 전혀 기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리셨고 그를 통해 바로는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무섭게 꾸짖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12:18-19)” 화는 바로가 냈지만, 사실 그것은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지경까지 간 것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을 저버린 대가였습니다. 그의 선택은 결국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고, 비겁한 남편으로 전락시켰고, 믿음 없는 신자가 되게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믿는 사람도 영적 가나안의 자리를 포기하면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과 문제들이 몰려오게 됩니다. 기근이 있더라도 약속의 땅을 떠나지 않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3. 가장 복된 삶은 주님이 뜻하신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장 복된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자리에 있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다시 돌아옵니다.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13:3)”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으로 돌아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자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곳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부르면 그 자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영국 성공회의 목사였습니다. 그는 청교도 어머니의 영향으로 철저하게 경건을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웨슬리가 배를 타고 선교를 가다가 큰 폭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폭풍으로 웨슬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찬송 소리가 들렸습니다. 갑판 위에서 모라비안 교도들이 폭풍우 속에서 기쁨으로 찬송을 부르던 것이었습니다. 웨슬리는 자신은 목사임에도 죽음에 대한 공포로 떨고 있는데, 모라비안 평신들이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찬송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아가 자기 안에 구원의 확신과 기쁨이 없는 것을 깨닫고 구원을 열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웨슬리에게 1738524일 변화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그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나간 런던의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한 집회에 참여했는데,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듣는 가운데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짐을 경험했습니다. 그 후 웨슬리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웨슬리가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이 뜻하신 자리에 거함으로 가능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 거할 때 우리 삶이 가장 복된 삶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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