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 189; 당신의 하나님은 살아계신가,,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 묵상 189; 당신의 하나님은 살아계신가,,

일요시사 0 1072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이면 커피를 들도 정원에 나가 잔디밭을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다. 겨울에는 7시 30분에 뜨던 해가 요즘은 7시가 채 되기도 전에 떠오른다. 아침 이슬을 맞은 잔디가 햇살을 받으면 초록색으로 빛을 발하며, 신선한 생명을 발산한다. 아침 잔디의 이러한 모습에 마음을 빼앗긴다. 내 마음의 정원에도 이런 신선한 생명의 빛이 가득하기를 바래본다. 

 

하나님의 나라는 동터오는 아침의 봄 동산과 같다. 어둠을 물리치고, 신선한 생명의 빛으로 임하는 나라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사랑을 싣고 아침 햇살처럼 찬란하게 비추는 나라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가득한 나라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따듯한 봄 햇살처럼 우리 마음에 은혜의 빛으로, 사랑의 빛으로 가득하게 임하는 나라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모두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동산에 들어와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크게 임하는 자리, 은혜의 빛이 가장 강하게 비추는 자리가 십자가다.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한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들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런데 이 엄청난 진리가 아침 잔디처럼 신선한 생명으로 마음 안에 살아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천상천하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자녀들 마음 중심에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은혜 가득한 십자가의 사랑으로 성도들의 마음 중심에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내 마음 안에 십자가의 사랑으로,,, 임재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살아있는가,,, 그 하나님을 과연 얼마나 만나며 살고 있는가,,, 그 하나님이 과연 얼마나 나의 마음과 일상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살아계시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늘 가까이 만나며 살기는 쉽지 않다. 아니, 매우 어렵다. 왜 그럴까??

 

유대인들,,, 이들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었던 사람들도 없다.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던 사람들이 유대인들이다.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는 것은 기본이고,, 바리새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고, 일주일에 이틀을 금식하고, 성경말씀도 빠싹하게 알고 있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존경 받는 신앙인들이고, 영적 지도자들이다. 그런데 주님에게 허구한날 혼나고, 질책을 당했다. 왜? 외식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외식,,, 연극배우에서 나온 말이다. 종교적 열심은 있었지만,, 그래서 경건해 보이는 종교적 행위로 겉 치장은 아주 훌륭하게 잘 되어 있었지만,,, 주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연극배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열심히 연기하는 연극배우,,, 그들의 속 마음에 하나님은 살아계시지 않았던 것이다. 살아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확실하게 믿었고, 모든 종교활동에도 열심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중심에 하나님은 살아계시지 않았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겉모습은 경건한 신앙인이지만, 그 속은 무덤과 같다,,, 죽음의 세계다,,, 속 사람은 죽어있었던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나를 지켜주시고 인도해가신다는 사실만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 안에 들어와 실제로 살아계심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 살아계신 하나님 안에 있는 나라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곳에 하나님의 나라도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경건과 종교적 열심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실 때, 하나님의 나라도 살아있다. 신선한 생명의 빛으로 살아있고, 찬란한 은혜의 빛으로 살아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살지 못한다면, 겉 모습은 살아있지만, 속 사람은 죽은 상태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음 중심에 살아계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의 주가 되시고, 나의 머리가 되셔서 나를 다스리시고, 나는 다스리심에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살아계신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삶이다. 

 

신경외과 인턴 시절에 중환자실에 가면, 뇌수술을 받고 누어있는 환자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인공호흡기를 부착하고 링거를 맞으며, 의식이 없는 상태로 누워있는 모습,,, 살아있지만, 죽은 자의 모습,,, 식물인간이다.

 

식물인간,,, 주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에 주님께서 안 계신 상태가 바로 이런 모습과 같다. 내가 머리가 되어 살아가는 상태가 영적으로는 식물인간의 상태다. 내가 머리가 되고, 내가 주인이 되고, 주의 영광보다 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영적으로는 무뇌아요, 식물인간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중환자실에 누워있어야 할 식물인간들이 아닌가,,,

 

주님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실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머리가 몸을 다스리는 것이지, 몸이 머리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자기가 머리가 되려고 한다. 주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에 자기가 앉아있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기도할 때, 예배 드릴 때만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고, 주는 나의 주님이시다. 평소에는 자기가 하나님이고, 자기가 주님이다,,, 자기가 머리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셔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돌보심을 받으며 살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여호와께서 또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보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신 9:13) 목이 뻣뻣해서 불순종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얼마나 목이 뻣뻣한 자들인가? 노천명 시인은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라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목이 뻣뻣해서 슬픈 자들이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순종은 우리 주, 우리 하나님의 다스리심 앞에 고개 숙이고 들어가는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나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귀하게 여기며 사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나보다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의 나라보다 주의 나라를 더 귀하게 여기며 사는 것이 순종이다. 내가 잘 되고. 나의 집이 잘 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집이 잘 되는 것을 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순종이다. 

 

하나님의 자녀 됨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기에 있다. 나보다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의 집보다 하나님의 집이 잘 되는 것을 더 기뻐할 수 있는 모습이 바르게 서 있는 하나님 자녀들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찬란하게 빛나는 십자가 사랑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자녀들의 모습이다. 진실로,,, 하나님의 십자가가 마음 안에 살아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는 실상,,, 하나님께 조차도 머리를 숙이지 않고 살아가는 목이 뻣뻣한 자들이다. 하나님보다 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집보다 나의 집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목이 곧은 백성이다. 그러나,, 나보다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내 집이 잘 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집이 더 잘 되기를 바라며 사는 자들,,, 이들이 하나님 앞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 사는 자들이다. 

 

문제는 이렇게 살기가 너무 어렵다는 데 있다. 어려운 이유는 내가 먼저 죽지 않고는 안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진정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주를 위해서 살려면, 먼저 내가 죽어야 한다. 내가 죽지 않고 순종은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죽는 것,,,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눅 9:23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자기부인의 십자가,,, 내가 죽는 자리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께서 사시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 2:20에서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으로 사시는 모습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삶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하나님의 이런 말씀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먼 남의 나라 이야기로 들린다. 왜? 우리의 현실의 모습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되는 줄은 알겠는데, 그게 안 된다. 주님을 늘 가까이 하고 모시며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주님은 간 곳 없고 내가 왕 노릇하고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시계추처럼 이리 흔들, 저리 흔들,,, 왔다 갔다 살고 있지 않은가? 이게 현실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그건 성경말씀이고, 나는 이것밖에 안 되니, 이대로 살련다? 맞다.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붓고, 의지를 다 끌어올려도 내가 완전히 죽고,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살 수는 없다. 어차피 오락가락하며 사는 존재들이 우리의 실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요한 것은 중심추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연약해서 시계추처럼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지만, 중심추는 항상 주님에게 있어야 한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머리가 몸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머리에 붙어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우리의 머리 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붙어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에게 붙어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중심추가 되셔서, 우리를 붙들고 계신 것이다. 이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는 시계추처럼 이리 흔들, 저리 흔들 하며 살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잊지 말자.

 

그러나,,, 수시로 체크하며 살자. 나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중심으로 흔들리고 있는가,,, 아니면, 혹시 내가 머리에 앉아서 살고 있지는 않은가,,, 날마다 이 사실을 체크하자.

 

믿음이 자라나가면서, 점차적으로 나는 작아지고, 내 안에 주님께서 커지게 된다. 내가 작아지고 죽는 만큼, 내 안에 주님은 커지시는 것이며, 주 앞에 고개 숙여 순종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각자 자기 믿음의 분량대로 살자. 때로는 시계추처럼 흔들리더라도, 자기 믿음의 분량대로 살자. 그러나 수시로,, 머리가 되시고, 중심추가 되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살자. 수시로,, 주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기를 힘쓰자. 

 

주님께서 다스리시고, 주님께서 이루어 가신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아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진솔하게 무릎을 꿇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처럼 종교배우가 되지는 말자.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 사랑에 의지하며 살자.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이 우리를 붙들어주신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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