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침 묵상 190; 화룡점정,,

기독교


 

채원병의 아침 묵상 190; 화룡점정,,

일요시사 0 911

화룡점정,,, 중국 양 나라의 장승요라는 사람이 용 두 마리를 그렸는데 눈은 그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해서 “왜 용의 눈은 그리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어보자, 화백은 눈을 그리면 용이 날아가버리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는, 용 두 마리 중 한 마리에만 눈을 그려 넣었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며, 용이 벽을 치고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어떤 일을 마무리 짓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용이 정말 살아서 하늘로 올라갔을 리는 없지만, 눈이 없는 용은 죽은 용이다. 용은 눈이 있어야 살아있는 용이다. 우리 신앙에서 화룡점점은 무엇일까?

 

갈 2:20 말씀처럼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모습이 아닐까,,, 믿음이란 결국 내 안에 나는 작아지고, 그리스도께서 커지는 자리로 나가는 것이다. 주님께서 진정한 나의 주님, 나의 LORD기 되시는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믿음이란 무엇인지,,, 믿음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말하고 있다. 이 믿음이 그를 자신은 죽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신앙으로 이끌고 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바울은 이 사실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사랑이 도대체 어떤 사랑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골로새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골 1:15, 16)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으려니까,, 좀 막연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나님이 막연하게 느껴지니까,, 믿음도 막연하게 믿는 믿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을 보면, 다소 막연해 보였던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왜?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보이는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찾아오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이고, 예수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며, 예수님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보이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이 보이고, 우리가 믿음 안에서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 지가 보이게 된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믿음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런 구체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다. 바울의 믿음에는 주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마음에 새기고, 그 믿음으로 살고 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생각하니, 놀라운 주님의 사랑이 바울의 머리를 강타한 것이다.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우주 만물은 물론이고, 천상천하의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런데 이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나를 위해서 자신을 버리셨다,,, 예수의 사랑,,, 바울은 그 사랑에 사로잡혀, 그 믿음 안에서 살았다..

 

도대체 왜? 내가 무엇이길래,,,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으셔야 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셨는가? 

 

이유는 오직 하나,,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 믿음의 핵심내용이다. 성도란 주님의 이 십자가 사랑에 사로잡힌 자가 되어, 이 믿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이 믿음이 우리를 고난 가운데서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고, 이 믿음이 평강과 기쁨을 주며, 이 믿음이 예수 안에서 굳게 서게 한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9절에서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성도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이고,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 사랑 안에서 내 안에 있는 나는 점점 작아지고, 내 안에 주님께서 사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님의 사랑을 배워나간다.

 

예수의 십자가 사랑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십자가 사랑으로 세워진 나라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태어난 성도들의 사랑으로 아름답게 피어나는 나라다. 

 

눈이 없는 용은 용의 모양은 있으나, 죽어있는 용이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눈이 없는 용처럼 죽은 믿음인 것이다. 그러나 눈이 있는 용은 살아있는 용이다. 사랑이 바로 화룡점정과 같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4) 우리의 믿음은 사랑으로 온전해진다. 

 

 

 

 

채원병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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