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모실 준비가 되었습니까? (눅 19:1-10)

기독교


 

예수님을 모실 준비가 되었습니까? (눅 19:1-10)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 땅의 천하고 보잘 것 없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영적으로 이 말구유는 세상의 때가 묻고 상처 난 인간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말구유 같은 우리 인생에 오셔서 좌정하기를 원하십니다. 관념적이나 의식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기를 원하십니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성탄의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올해도 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하시는가?” 라고 질문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크리스마스의 가장 큰 은혜는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을 진정한 왕으로 모시길 원하신다.’ 것입니다. 그것이 말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그 예수님을 모시려면 우리 마음이 어떤 마음이 되어야 하는지 3가지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우리 마음이 빈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말구유에서 나셨던 것은 낮고 천한 땅에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동시에 말구유에 태어나실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말구유가 비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2:6-7)“ 당시 여관들은 비어있지 안았기에 예수님은 여관에서 태어나실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마구간의 말구유는 비어있었기에 예수님이 태어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어있는 말구유처럼 빈 마음에 임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그럴듯한 신앙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마음이 비어 있지 않으면 예수님은 그 마음에 오실 수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5:3)“ 빈 마음은 가난한 마음이요 겸손한 마음입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넘어짐을 통하여 우리 마음은 가난하고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리장이고 부자였지만(19:1-2), 동족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동족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자들이었기에 미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 당시 죄인의 대명사 중 하나가 세리일 정도였습니다. 세리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이러하였는데,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세리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세리장으로 그가 받았을 미움과 손가락질은 엄청났을 것입니다. 성경은 삭개오를 가리켜 세리장이요다음에 또한 부자라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재물이 많음에도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으나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는 그는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이런 실패와 상처, 공허감으로 내가 더 이상 이대로는 살 수 없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가장 잘 나가는 인생인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삭개오처럼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깨닫는 게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이며 주님이 찾아오시는 빈 마음입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 이러한 빈 마음을 가지고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설 때 우리는 내세울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정말 나를 볼 줄 아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빈 마음을 주님은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2. 예수님에 대한 갈급한 마음이 예수님을 모시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갈급함이 있어야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향한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미움과 정죄, 그리고 인생의 공허감으로 빈 마음이 되었을 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영접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삭개오의 마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갈망이 생겼습니다.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19:4)”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예수님을 보려고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19:3)” 키가 작은 게 문제였습니다. 키가 작다는 건 단순히 신장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기에 너무 큰 영적인 자괴감을 뜻하는 것입니다. 세리라고 낙인찍힌 죄인이라는 자기인식이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장애물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장애물이 있었는데,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데 사람과 환경이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제대로 믿고 봉사하려는데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고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장애물 앞에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19:4)” 갈급한 심정으로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갔고, 그러한 삭개오를 예수님은 쳐다보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던 삭개오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 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갈급한 마음을 아시고 그의 집에 거하셨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께 갈급한 마음을 가졌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향한 갈급한 마음을 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삭개오를 부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음성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3. 예수님을 즐거이 모시는 마음이 삶의 놀라운 변화를 가져옵니다.

   한 왕이 난을 당해서 신하들과 더불어 평민의 복장을 한 채 피난길을 나섰습니다. 위험한 길을 가다 어느 시골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의 한 농부의 집에 며칠 유하자고 청했습니다. 농부는 마음이 어질고 좋은 사람으로 누군지도 모르면서 기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대접했습니다. 난이 해결되자 고마웠던 왕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이 은혜를 갚고 싶으니 당신 소원을 말해 보시오왕의 요청에 농부는 저는 별다른 소원이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건강하고 먹을 것도 있고 괜찮습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그래도 왕이 소원을 말해보라고 계속 요청하자 농부는 환갑잔치에 참석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며칠 지나 환갑 잔칫날이 되자 그 집에는 왕의 대행차가 있었습니다. 환갑잔치는 왕이 참석하는 굉장한 잔치가 되었습니다. 농부는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가 되었고 수많은 예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왕을 영접해도 놀라운 복을 받는데 예수님을 영접하면 더욱 놀라운 복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의 집으로 영접했습니다(19:6). 그는 사랑하는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예수님을 즐거이 모시자 그의 삶은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평생 재물에 눈이 어두워 살던 그가 더 이상 재물에 탐심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남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은 네 갑절이나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생각과 가치관이 바뀐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도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즐거이 모시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삶의 놀라운 변화가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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