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성도가 가져야 할 자부심) 행 26:19-29

기독교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성도가 가져야 할 자부심) 행 26:19-29

일요시사 0 1950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성도가 가져야 할 자부심)

행 26:19-29

 

직업 중에서 가장 힘든 직업이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이라고들 합니다. 그 중에서도 전화상담원들의 고충이 크다고들 하는데, 에덤스라는 교수가 그들을 대상으로 한 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에 참가한 상담원들은 ‘대학생들의 장학금을 모금하는 일’로 상담전화를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냉담한 반응에 상담원들의 사기는 점점 실추되었습니다. 이때 에덤스는 상담원들과 모금의 혜택을 받는 장학생들을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장학생들은 상담원들에게 진심을 담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였고 그 후 상담원들의 통화량이 늘고 모금액도 몇 배로 늘어난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상담 직원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즉, 내가 하는 일은 ‘구걸하는 일’이 아니라 ‘구원하는 일’이라고 생각이 바뀌며 자부심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부심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적절한 자부심은 우리로 하여금, 나의 나됨과 나의 일에 대해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더 풍성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의 자부심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고소를 당하여 총독 앞에서 심문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변호는커녕 오히려 복음을 선포하는 행동을 보입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가 아닌, 복음전도의 사명에 관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총독 앞에서, 분명 객관적으로 바울이 고워관직들을 부러워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바울은 오히려 그들이 자신을 부러워해야 함을, 즉 ‘자신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당당히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바울은 눈앞에 왕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자부심이 우리가 배우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자부심입니다.

 

1. 바울은 무엇보다 ‘예수 만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만남’입니다. 헬렌 켈러가 그의 선생 설리반을 만났던 것처럼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무엇보다 만남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만남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바울은 자부심으로 놓고 보면 정말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질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5-6절에서 그가 자기를 소개하기를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라고 고백합니다. 이렇듯 충분히 자신의 조건에 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바울은 그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조건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행 26:12-18까지의 말씀만 보더라도 바울의 예수님과의 만남은 너무나도 귀합니다. 그 만남이 있었기에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다른 자부심 말고 이 자부심이 있기를 원합니다. “나는 예수님 만난 그리스도인입니다.”

 

 

2. 바울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22절에 보면 바울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내가 오늘까지 지내온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 결과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떤 사람 혹은 어떤 가정이 가장 부러우신가요? 자녀의 축복, 물질의 축복, 가정의 화목 등 우리의 부러움을 살만한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말 부러워해야 할 대상은 과연 누구일까요?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가정입니다. 임마누엘,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귀한 복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바로 이 복입니다.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복을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복보다 귀한 복이기 때문입니다. 

 

 

3. 바울은 복음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복음’이라는 단어의 뜻은 좋은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역사를 통틀어 인간에게 가장 좋은 소식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잘 아는 요 3:16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이 복음을 두 단어로 말하면 무엇일까요?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그 후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십자가는 죄인 중에서 죄질이 가장 나쁜 죄인이 잔인하게 처형되는 형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 생각에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가 가장 비참하고 잔인한 형틀에서 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은 그런 사람들의 생각을 전혀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23절) 또한 그는 로마서 1장 16절에서 더 나아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선포합니다. 즉 바울이 그토록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복음은 그것을 믿는 자가 누구인지에 상관 없이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확신으로, 복음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복음이 능력이라는 가장 큰 증거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바로 나 같은 자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자신을 들여다본다면 하루에도 수십 번 죄 가운데 사는 나 같은 자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의 능력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자랑하고 무엇을 자부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다시 말하면 오늘도 우리 주님이 역사하시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고 자신 있게 복음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을 선포할 때,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과 기적과 은혜가 충만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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