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2) 십자가의 능력 <로마서 3:19~26>

일요시사 0 106

로마서 3:19-26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많은 성도님들이 교회를 다니지만, 정말 그냥 교회만 다니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단순히 마음의 평안을 위해, 교제를 위해, 복 받고 싶어서.. 종교생활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순절 절기를 지내면, 그 시간이 감격과 은혜의 시간이 되기보다는 답답하고 힘든 시간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나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아무런 감동도 없이 지나 보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은 나의 이 땅에서의 행복한 삶만을 위해 존재하는 분에 불과합니다. 내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때 달라고 하고, 그 요구만 들어주면 끝입니다.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정한수 떠놓고 달에게 비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정말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 부활의 신앙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에 있어서, 믿음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 물론 그것도 중요하죠. 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가 부활의 능력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제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능력을 모릅니다. 더 나아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십자가의 감격을 체험한 사람도 어느 순간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십자가가, 부활의 기쁨이 나에게 어떤 특별한 의미도 주지 못하게 됩니다. 매년 지나는 사순절, 매년 지나는 부활주일, 매 번 듣는 말씀. 여기서 끝나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맨 날 복만 달라고, 내가 열심히 교회 다니는데 왜 이런 어려움이 생기냐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고 입고 먹으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염려에 머무는 신앙이 아니라, 생명에 관한 말씀으로 한발자국 더 나가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삶의 문제는 염려라고 말하고, 십자가를 향해서는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능력을 이미 받아 누리고 있는 우리 성도님들! 때로는 내 삶의 염려가 앞서고 십자가의 감격이 퇴색되어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십자가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다시금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능력을 다시 한 번 되새김을 통해 십자가 부활의 능력이 우리 안에 새롭게 임하는 시간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능력 첫 번째,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 

여러분! 이 앞에 십자가를 한 번 보십시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가만히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합니다. 때로는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힘이 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또 슬픈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건 십자가를 계속 바라보면 십자가만 보이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비춰진다는 겁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님의 그 사랑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와 함께 항상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이 생각나는 겁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통해 비춰지는 나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이처럼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고기잡이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밤새도록 베드로와 그 일행은 물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전혀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그 말씀에 따라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게 됩니다. 그리고 주변에까지 도움을 청해야 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베드로가 어떻게 합니까? 물고기를 많이 잡게 된 것으로 인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생각에는 기뻐 춤을 춰야 하는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죄를 들춰내셨습니까? 과거의 행적들을 낱낱이 열거하면서 정죄하셨습니까? 갑자기 그 순간 베드로가 많은 죄를 저질렀습니까? 아닙니다. 영적인 눈이 뜨여지면서 예수님을 바라보자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사도바울이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다메섹도상에서 만난 예수님! 십자가 못 박힌 그 예수님을 만났기에 의로움의 자랑을 벗어던지고 십자가를 자랑하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바라보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밝히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능력 첫 번째,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입니다.  
  
우리의 삶을 보면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에 죄를 지을 때는 두려워하고 초조해하다가 막상 발각되면 내 잘못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우깁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만의 잘못은 아니다. 그 사람 잘못이 더 크다.” 그러면서 핑계를 대고 우겨댑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합니다. 내 죄가 아니라고 너무나 당당하게 우겨댑니다. 끝까지 자존심을 내세우며 버팁니다. 이게 저기 다른 사람들만의 이야기입니까? 이게 몇몇 얼굴에 철판 깐 사람들만의 이야기입니까?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죄를 깨달았다면 죄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의 첫 번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죄를 인정하는 것은 십자가의 두 번째 능력인 동시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분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두 번째, “죄를 인정하는 능력”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면 죄를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그 죄를 나의 죄라고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죄를 깨닫는 것,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아는 것에 그치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죄가 내 죄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못하는가? 죄를 상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그래. 내가 잘못했어. 내가 죄인이야. 그래도 내가 저 사람보다는 낫지 않냐?” 이겁니다. 
  
죄를 상대적으로 생각하는 경우와 빗대서 좀 더 와 닿는 말씀을 드려볼까요? 어떤 모임에 지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뒤에 나보다 더 늦게 온 사람이 있으면 아주 반갑습니다. 마음에 평안함이 임합니다. “내가 꼴찌는 아니구나.” 그런데 어차피 늦은 건 똑같은 겁니다. 예수님을 만난 부자청년을 보십시오.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사랑스럽게 여기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가서 재산을 다 팔아서 이웃을 도와주라고 했을 때 그는 슬픈 기색으로 돌아갔습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만 있어도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데, 우리는 얼마나 부족한 게 많은 사람들입니까?
  
죄는 상대적인 것도 아니고, 내 선행이나 공로가 많다고,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내가 죄인임을 인정해야만 죄가 사라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내가 환자임을 인정해야만 병의 치료가 시작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죄를 깨닫고, 또한 그 죄가 내 죄임을 인정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죄를 깨달았고, 그 죄가 내 죄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내 죄를 깨닫고, 그것이 내 죄임을 인정했는데, 거기서 끝나면 어떻게 합니까? 죄책감 때문에 살 수가 없겠죠. 가룟 유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까지만 간 겁니다. 죄를 깨닫고, 그것이 자신의 죄임을 인정하는 것, 여기까지만 가서 멈춰버리니까 결국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야 십자가의 능력이 완성되어집니다.


십자가의 능력 세 번째, 죄 사함의 능력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우리는 예수 십자가의 흘리신 피를 의지해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죄 사함을 얻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합니다. “내가 내 죄 값을 다 치러야 하는데..” 업보라고 하죠. 하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의 죄 값은 예수님께서 이미 대신 치러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인정하고 고백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요, 보혈의 능력입니다. 히브리서 9장에 보면 구약시대의 제사와 예수님의 십자가를 비교하면서 말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구약시대에는 가축의 피를 뿌려 정결하게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씩 모든 백성들의 죄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짐승의 피로 죄를 대속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해 모든 인류가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에도 말씀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함이니.” 죄 사함을 위해서는 피가 필요한데, 이제는 짐승의 피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써 우리를 정결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본문 21절과 22절 말씀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아멘! 여기서 중요한 낱말이 있습니다. 한 번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이전까지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우리가 죄인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우리가 다 불의한 자였습니다. 이전까지는 우리가 다 사망의 권세에 종노릇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우리가 율법 아래서 율법에 메여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제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의가 나타나, 이제는 우리가 의인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죄 사함의 능력, 부활의 능력입니다.  

십자가 부활을 통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우리 모든 성도님들! 다시 한 번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십자가 사랑의 감격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십자가를 향한 나의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십자가 능력을 통한 완전한 영적 치유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서 십자가 능력으로 새롭게 일어나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며, 은혜와 축복의 삶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9-04-22 20:54:02 교민뉴스에서 복사 됨]
0 Comments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