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광림교회 주일설교 (3) 어떤 복을 누려야 하는가? 정명환 목사

기독교


 

뉴질랜드광림교회 주일설교 (3) 어떤 복을 누려야 하는가? <시편 73:28> 정명환 목사

일요시사 0 1037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복입니다.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을까? 그래서 매년 새해가 되면 인사하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해피 뉴 이어” 인종과 나라와 민족이 달라도 똑같이 복된 새해를 기원하는 인사를 주고 받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누구나 그렇게 바라는 “복” 그럼 정말 우리가 사모하고 누려야 할 복이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어떤 복을 누려야 하는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복을 향해 가면서도, 또 어느정도 그 복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누리지는 못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는 정말 참된 복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정작 그 복을 만들어 가는 데만, 추구하는 데만, 쌓아놓는 데만 급급하다가 정작 누리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누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겁니다. 제가 “누린다.”라는 단어를 참 좋아하는데, “누린다.”의 의미를 찾아봤더니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상황 속에서 마음껏 즐기거나 맛보다.” 한 마디로 내가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제대로 누리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모으기만 하고 쓰지 못하면 누리는 게 아닙니다. 

계속 더 모으려고만 하면 누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는데, 그것에 대한 감사가 없다면 누리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는데, 아직 더 많이 받아야겠다는 욕심에만 급급하다보면 정작 아무 것도 누리지 못합니다. 또는 내가 이미 하나님의 축복 안에 거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정작 아무런 축복도 누리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민수기 2장에서 표현할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를 가장 깊이 체험했을 때는 광야에서 생활할 때였습니다. 

그 속에서도 하나님과 가까이 함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 속에서도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의 축복의 땅을 차지하고, 또한 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 광야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가나안의 축복도 누리지 못하고, 광야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은 더 큰 가나안의 축복 또한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 가까이함을 통해 우리가 정말 누려야 할 복은 무엇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말씀의 복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할 때에 우리는 복을 누리게 되는데, 그 첫 번째 복이 무엇인가? 바로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 듯, 시편 1편의 말씀과 시편 150편 전체의 말씀을 보면 세상적인 생각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자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항해를 하는 배가 파도를 만날 때 뚫고 나오는 힘은 동력에서부터 나옵니다. 우리 신앙의 삶 역시 말씀이라는 동력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세상의 문제 가운데서도 넘어지지 않고, 이기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렇기에 매 주일마다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그 말씀이 내게 생명이 됩니다. 

대심방 때에 주어지는 그 말씀이 내게 한 해를 살아갈 힘이 되어줍니다. 주야로 묵상하는 그 말씀이 내게 큰 복의 근원이 되어집니다. 광야의 이야기를 처음에 말씀드렸는데, 상황과 환경만 다를 뿐 똑같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주변을 바라보지 않고, 그 약속의 말씀을 의지했습니다. 악인들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들의 자리와 같은 세상적인 것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 주신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내게 가장 큰 힘과 권세가 되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영적 에너지로 가지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그 힘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는 것입니다. 말씀이 체험되어지는 삶이야말로 말씀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자, 하나님 주신 말씀이 나의 삶을 이끌어갑니다. 이러한 말씀의 복을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기도의 복을 누려야 합니다. 

말씀 안에 거하는 삶과 더불어서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가장 실제적인 것이 무엇인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면서, 가장 어려운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듣는 것에 비하면 기도는 훨씬 더 손쉬운 일입니다. 시간이나 장소에 구애 받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눈 뜨고 기도해도 되고, 눈 감고 기도해도 됩니다. 서서 기도해도 되고, 앉아서 기도해도 됩니다. 

누워서 기도해도 되고, 걸어 다니면서 기도해도 됩니다. 그렇기에 데살로니가 전서 5장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기도는 언제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떠오르는 다니엘을 볼 때 하나님 앞에 열심을 다한 기도로 오히려 죽임을 당할 위기 가운데도 쳐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 위기를 기회로 바꿔주셨을 뿐만 아니라, 변함없이 기도함으로 변함없는 하나님의 형통케하심의 복을 누린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했던 기도는 감사와 찬야의 기도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원망과 탄식의 기도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잘 보면 그 모든 기도들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시작은 원망과 낙심과 상처였을지라도, 결국에는 소망과 기쁨, 감사에 대한 고백으로 바뀌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복이 이런 겁니다. 내 뜻이 내 뜻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 바뀌어지는 것, 하나님의 뜻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삶이 이러하기를 바랍니다. 새벽마다 주님 전에 나와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삶, 개인적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묵상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삶,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늘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함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삶. 그 삶 가운데 올려드리는 모든 기도마다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가 되어지고, 응답의 은혜를 누리는 삶, 기도의 복을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하나님과 가까이 함의 복을 누려야 합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과 무엇을 하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할까요? 좋은 곳에 여행을 갔을 때? 정말 멋진 곳에서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행복할 때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냥 함께 있을 때입니다.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아도, 뭔가 대단한 이벤트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가까이 있는 것 하나면 충분하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다가 하나님 앞에 다가설 수 없는 존재가 되는데, 그것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더럽혀진 영과 육으로 인해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없는, 예배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다 깨끗해서 지금 이 자리에 모여 예배하고 있습니까? 아니지요. 히브리서 10장 19절 말씀처럼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 보혈의 공로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함의 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이 마련된 것입니다. 이러한 복을 기쁘게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것, 주일마다 주님 전에 나와 예배할 수 있는 것, 그게 정말 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 주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고, 충성할 기회가 생긴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하고 싶다고 다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나오고 싶다고 다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제사장조차도, 레위인조차도 율법에 어긋나면 주님 전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죄로 인한 부정함이 있으면 주님 전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담대히 주님 전에 들어갑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과 가까이 함의 복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걸 의무로 여깁니다. 어떤 큰 짐으로 여깁니다. 일 년에 52주 예배하는 것을 짐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어떤 큰 멍에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100미터 높이에서 아래의 강물로 멋지게 뛰어내립니다. 강물 앞에 거의 임박해서 다시 하늘로 쭉 올라갑니다. 

무엇 때문인가? 발목에 묶여 있는 줄이 나를 붙잡아 준 것입니다. 70미터 높이에서 단 3초 만에 바닥까지 내려옵니다. 머리카락은 다 하늘로 올라가고, 내 몸도 하늘로 올라갈 것 같은데, 안전하게 바닥까지 내려옵니다. 무엇 때문인가? 

안전바가 내 몸을 잡아 준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 주일성수하는 것, 하나님의 일을 위해 어떤 직분을 맡고, 직임을 감당하는 것 다 똑같습니다. 그게 때로는 나를 얽어매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내 몸을 잡아주는 안전 바와 같은 것입니다. 내 발목을 묶은 안전 줄과 같은 것입니다. 그게 사라지면 일시적으로는 자유로움 느낄 수도 있겠지만, 결과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 때로는 그것이 나를 힘겹게 하고, 나의 삶을 옭죄는 것 같을지라도 그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의 복을 풍성히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9-11-06 14:51:11 교민뉴스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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