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0) 길 가는 중에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0) 길 가는 중에 <마가복음 10:17,32,46~52>

일요시사 0 806

지금 우리는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사랑을 마음속에 기억하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믿는 우리들은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신앙생활하면서도 구원의 확신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한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겉으로는, 입술로는 당당하게 “나는 구원 받았다고 확신합니다.” 말할지 몰라도 마음 한 켠에 계속 의심과 두려움이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너무 복잡해서 그렇습니다. 아이처럼 순수하게 그냥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우리는 너무 이것 저것 재는 게 많다는 겁니다.

  

구원은 무엇으로 받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니느라.” 복잡한 것이 없습니다. 아주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사실 적나라하게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믿지만 인격적으로 부족한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확실한 믿음은 있지만, 세상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내가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행위로 따지면 구원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다만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는 그에 합당한 삶의 변화를 이루어가야만 하는데, 그게 바로 성화의 삶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성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우리는 지금 “길 가는 중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길을 가는 중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의 길 가는 중에 어떤 걸음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이 길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마가복음 10장 전체 내용은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 중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17절의 “길에 나가실새” 32절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46절의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다 길이죠. 그런데 이 길이 어떤 길인가? 3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길에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십자가 고난과 죽음의 예루살렘을 향해 길 가는 중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예수님 자신에게는 죽음의 길, 모든 인류를 향한 구원의 길, 그 길 가는 중에 만난 사람들의 모습이 오늘 그려지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이 땅의 삶을 살아갈 때 “생명의 길을 걸어간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사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죽음의 길을 걸어간다.”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합니다. 여기서 살면 살수록 생명과 가까워지는 분 계신가요? 살면 살수록 우리 육체는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예수님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면 갈수록, 육신적으로는 죽음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길을 죽음의 길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의 길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 믿는 자의 마지막 순간을 죽음의 문을 여는 순간이라고 하지 않고, 천국의 문을 여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요? 우리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그 길이 구원의 길이기에, 생명의 길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 길을 걷게 하시고, 그 길의 인도자가 되시고, 그 길의 끝이 되시는 분이 우리 주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의 출발도 하나님이고, 끝도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렇기에 오직 한 길입니다. 여러 개의 길 중에 하나, 수많은 길 중에 한 길, 좋은 길, 최고로 멋진 길이 아니라, 무조건 길은 하나뿐입니다. “Only Way” 오직 한 길. 구원의 길은 하나뿐입니다. 구원 받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그 길도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걷는 이 길, 바로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 삶에 주인 되시는 하나님! 우리가 걷는 이 길에 주인 되시는 하나님! 우리 주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예수님과 함께 동행함으로 생명의 길로 나아가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삶의 걸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내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 질문은 우리 스스로를 향한 것입니다. 우리가 걷는 이 길 위에서 우리는 내 마음 속에 무엇을 품고 있습니까? 내 중심에서 나를 움직이게 하고, 나를 이끌어가는 가장 큰 힘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것은 모두 길 위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한 번 볼까요?

  

첫 번째 사건입니다. 마가복음 17절에서 22절까지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시자마자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 앞으로 달려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묻죠.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다시 말해 “내가 영생을 얻기 위해 부족한 게 뭡니까?” 당당하게 질문하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너무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게 가장 부족한 점이니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재산이 너무 많은 것이 그 청년에게 가장 부족한 문제였습니다. 이 청년은 그 부족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근심하면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사건입니다. 32절에서 45절까지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이 당할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자마자 바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이런 부탁을 합니다. “주의 영광중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서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이 장면을 본 다른 제자들은 이를 보고 분히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말씀은 듣는 둥 마는 둥이고, 명예에 목숨 건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사건은 예수님의 수난예고와 제자들이 높은 자리 달라는 로비의 이야기와 다툼의 현장입니다.

  

이어서 마지막 세 번째 사건, 46절에서 52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여리고에서 구걸하는 맹인이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이름이 아니라,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는 아예 그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거죠.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에게 맹인 거지의 이름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말하는 거죠. “저기 디매오의 아들이 구걸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름도 없던 맹인이 예수님 앞에 뛰어나가서 눈이 떠지는 기적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사건은 맹인 거지 바디매오와 예수님과의 만남, 그리고 치유입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은 모두 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한 길 가는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부자 청년,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맹인 거지 바디매오. 똑같은 길 위에서 각각의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세 부류의 사람 중에 해피엔딩은 맹인 거지 바디매오 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중심에 무엇을 품고 있었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어떻습니까? 이 사람에게는 부자 청년과 같은 물질도 없습니다. 제자들처럼 사회적 지위에 대한 관심도 없습니다. 오직 그 중심에는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마음 하나뿐입니다. 그 사모함으로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자신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 받고, 치유 받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중심에는,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겉으로 보여지는 것,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 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넘어서 내 내면 깊숙이, 내 중심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서 내 삶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아뢰고, 주의 인도하심 안에 거하고자 하는 열정, / 주를 위해 최고의 예배를 드리고, 최선의 헌신을 드리겠다는 영적 사모함, 이 모든 것들이 내 중심에 자리할 때에, 우리의 가는 이 길이 생명의 길이 되어집니다. 내 중심에 오직 예수님만 모시고 참된 은혜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삶의 걸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바른 것을 구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보며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늘 담대함으로 기도하죠.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런데 그 전제 조건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면” 이게 전제조건입니다. 

  

그러면 헛된 것들을 구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욕심대로 구하지 않습니다. 원수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높아지는 것만을 구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만을 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는데, 어찌 세상 것만 구하고 있겠습니까?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으면, 당연히 하나님 기뻐하시는 것을 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보십시오. 처음에 만난 부자 청년은 계명을 잘 지켰습니다. 어려서부터 그 계명에서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을 아주 사랑스럽게 보셨습니다. 그런데 왜 정작 재물은 내려놓지 못할까요? 제자들은 지난 삼년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항상 예수님의 가르침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왜 정말 예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는 깨닫지 못하고, 높은 자리만 구하고 있을까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계명대로 행하기는 하였으나, 전심을 담아 행하지 못하고, 율법적인 행위에 머무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었으나, 그 말씀이 그냥 귀에만 머문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향해 “선한 선생님이여!” 라고 부르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선생님이여!”라고 부르고, 주변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는데, 오직 바디매오만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메시야로 이 땅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믿음으로 고백하고, 그 믿음으로 자신의 소원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바른 것을 구하고 응답받는 믿음이 있었다는 거죠. 우리도 바른 것을 구하고 응답받고 누리는 믿음의 주인공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9-11-06 14:51:11 교민뉴스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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