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3) 영광의 자리에 서라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3) 영광의 자리에 서라 <마가복음 9:2~8>

일요시사 0 821

마가복음 9:2-8

2.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사순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이제 사순절 기간의 절반을 지나가는 중에 있습니다. 이쯤에서 한 번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번 사순절 기간에 얼마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또한 내 안에 새겨가고 있는가? 나는 이번 사순절 기간에 주님 앞에서 얼마나 기도하고 있는가? 나는 이번 사순절 기간에 나의 욕심과 탐욕을 벗어버리고, 얼마나 주님께 집중하고 있는가? 주님 원하시는 영광의 자리를 향해 얼마나 나아가고 있는가?  

  

비아돌로로사, 십자가의 길, 예수님은 어떤 다른 길, 예수님 혼자만의 구별된 길을 걸으신 게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의 삶의 자리, 아둥다웅하는 그 삶의 터전, 여기 저기 행상들이 둘러 앉은 시장과도 같은 그런 곳, 삶의 문제들로 애타하고 힘겨워하는 그냥 그런 사람들이 자리한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찢기고 상처받은 그 몸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도 없는 십자가를 지시고, 몇 번이고 넘어지고 쓰러지며 채찍질 속에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그 삶의 자리 한가운데를 걸어가신 것입니다. 다만 그의 걸음이 다른 것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심으로 그 길이 생명의 길이 되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심으로 그 길이 부활의 산소망을 주는 길이 되어지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심으로 그 길이 참된 영광의 길이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를 걸어가고 계신지요? 우리의 걸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요? 우리의 걸음 끝에 무엇이 예비되어있는지요?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그 삶의 길, 지금 영적으로 사순절 십자가의 길, 그 길에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 부활의 길, 참된 영광의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부활신앙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1950년대, 미국 인디언 보호구역에서는 유난히 마약과 알코올 중독, 폭력문제가 심각했다고 합니다.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심리학자 에릭슨을 중심으로 한 연구팀이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에릭슨은 묘한 상황에 처한 인디언 아이들을 발견했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백인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교사는 그들에게 ‘인디언 짓’을 한다며 꾸짖었습니다. 반면 그들이 집에 가면 부모가 ‘백인같이 군다.’며 야단을 쳤습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습니다. 

  

그러면서 터득한 것이 자기 부정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야단을 맞지 않으려면 인디언이든 백인이든 어떤 색깔도 드러내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고, 자기 존재를 지워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다 잃어버린 것이죠. 그러자 남은 것은 무력감과 좌절감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약과 알코올에 물들어갔고, 폭력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을 붙잡고는 있지만, 세상 속에서 살기에 우리의 영적 정체성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지, 세상 편에 서 있는지 혼란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는 하나님 편, 세상 속에서는 세상의 편. 한 쪽 다리는 교회에, 한 쪽 다리는 세상에 걸치고 살아가는 그런 상황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면서 점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겁니다. 정체성은 배의 엔진과도 같은 겁니다. 아무리 큰 배도 엔진이 멈추면 작은 파도에도 떠밀리게 되고, 결국은 좌초되고 마는 거죠. 하지만 엔진에 힘이 있는 배는 사나운 비바람과 파도에도 가라앉지 않고, 자신의 목적한 곳을 향해 힘 있게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도 이러한 배의 엔진과도 같은 정체성이 필요한데, 그렇다면 우리 믿는 자의 정체성이 어디서 오는가? 내 안에 자리한 예수 십자가 부활신앙이 믿음의 정체성이 됩니다.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8장 3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알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변화의 영광을 보이신 후에 예수님은 산을 내려오셔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시는 기적을 행하시는데, 그 기적의 역사에 이어서 곧바로 다시금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두 번의 예언의 말씀, 그 중심에 오늘 예수님의 변화산의 영광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예수님은 앞뒤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고, 오늘 변화산의 기적을 통해서 자신의 말씀을 미리 직접 눈으로 목도하게끔 보여주신 것입니다. 왜요? 부활의 신앙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죽으심의 순간이 이제 곧 다가오고 있는데, 그 죽으심의 현실 가운데 낙심하지 말고 부활의 신앙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한 복음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예수, 십자가, 부활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 가운데 보내셨다. 너희들이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삼일만에 부활하셨다. 이 일에 우리가 증인이다.” 베드로가 전한 설교는 이 것 뿐이었습니다. 십자가 부활의 신앙을 전한 것뿐입니다. 그럴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얻고 회개하고 돌아와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 부활의 생명력 있는 변화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믿는 자로서 붙잡아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십자가, 부활입니다. 그게 우리 믿는 자의 변함없는 정체성입니다. 우리 믿는 자의 가장 큰 힘과 능력과 권세입니다. 그러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은 죽음과도 같은 현실일지라도 내 안에 부활신앙이 있으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바로 이러한 믿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부활의 영광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사흘이라는 시간을 참고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죽음 속에서 삼일을 기다리는 믿음의 기다림 뒤에 부활의 영광이 꽃을 피웁니다. 예수 믿는 자로서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 영광의 자리에 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오직 예수 뿐입니다. 변화산의 영광을 바라보는 베드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환희와 기쁨에 빠져서 5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그럼 오늘 왜 수많은 믿음의 인물들 중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 자리에 함께 등장하고 있는가?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인물입니다.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 선지자의 대표이자, 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지녔다고 여겨졌던 엘리야가 그 자리에 함께 나타났으니, 베드로에게 얼마나 큰 영광의 순간이었겠습니까? 그렇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곳이 좋습니다. 이 곳에서 초막을 짓고 살고 싶습니다. 저희들이 초막을 짓고 세 분을 섬기면서 살겠습니다.”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구름이 덮이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의 음성 뒤에 고개를 들어 보니, 8절입니다.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오직 눈앞에는 예수님 한 분 뿐이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눈앞에 보이고, 그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신들만 그 앞에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아무리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모세도 지나갑니다. 엘리야가 아무리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엘리야도 지나갑니다. 다시 말해 율법도 지나갑니다. 예언도 지나갑니다. 왜?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자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언의 성취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지나가고, 엘리야도 지나갑니다. 율법도 지나가고, 예언도 지나갑니다.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우리의 시선이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을 향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를 우리에게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를 바라보라.” 이어서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너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라.” 오늘 본문에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바로 이어서, “자기들뿐이더라.”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예수님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지금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지금 주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더라.” 우리가 바라볼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또한 그 예수님을 바라봐야 할 사람은 다른 어떤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오직 예수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시선에 합당한 예배의 삶, 말씀과 기도의 삶, 복음 전파의 삶을 살아갈 때에, “오직 예수와 자기들, 아니 나뿐이더라.” 이 말씀에 합당한 삶이 우리에게 이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그 시선에 합당한 나의 삶을 살아갈 때에, 영광의 자리에 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영광의 자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직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미 천국의 삶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화의 모습을 바라보며, 천국과도 같은 기쁨과 환희를 느끼며, 고백합니다.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산 아래로 내려가자.” 지금 보여지는 영광의 자리, 아직 실현되지 않은 천국의 기쁨에만 빠져있지 말고, “저 산 아래로 내려가자.”

  

산 위에서 천국의 기쁨을 누리고 있을 때, 산 아래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지는 않았지만, 똑같은 그 순간에 제자들은 궁지에 몰려 있습니다.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주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기도하는 것도 다 포기하고 주위 사람들과 변론하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 말씀의 권세로 귀신을 내어 쫓으십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십자가 부활을 다시금 선포하십니다.

  

보십시오. 산 위에 있을 때는 천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산 아래로 내려오니까, 감당 못할 문제 속에 빠진 이들이 있습니다. 낫지 못해 귀신에게 조종당하는 아이, 그 아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아버지, 의기양양하게 기도하며 선포하다가 실망에 빠진 제자들, 저들을 조롱하며 비웃는 무리들. 산 아래의 현실은 암울하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모든 것이 막힌 현실입니다. 질병의 문제, 안타까움, 탄식, 실망, 조롱으로 얼룩진 모습입니다. 이게 지금 산 아래의 현실이고, 이게 지금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 산 아래,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가 제2의 변화산입니다. 변화산 그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산 위 영광의 자리만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장소에 예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 어느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자리에 누가 거하고 있느냐입니다. 오늘 산 아래는 감당 못할 아픔의 장소, 탄식의 장소였습니다. 실망과 낙심의 장소였습니다. 다툼과 갈등의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실 때 모든 것을 변화시키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금 현재 내 삶의 변화산은 내가 거하는 가정, 내가 거하는 학교, 내가 거하는 사업장, 내가 거하는 직장입니다. 우리는 변화산 영광의 자리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지만, 동시에 내가 거한 처소를 변화산 영광의 자리로 바꿀 책임을 가진 자들입니다. 믿음으로 내게 주어진 삶의 자리를 변화산 영광의 자리로 바꾸어 가시는, 그래서 그 영광의 자리에 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9-11-06 14:37:16 교민뉴스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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