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4)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4)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일요시사 0 871

빌립보서 2:5-11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삶의 모든 이치는 위에서 아래로 흘러갑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모든 것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갑니다. 물질은 부함에서 가난함으로 흘러야 하고, 힘은 강한 자에게서 약한 자에게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걸 자꾸 거스르려 한다는 거죠. 가난한 자에게서 부한 자에게, 약한 자에게서 강한 자에게로, 물질과 힘의 분배가 이치를 거스르려 할 때가 많습니다. 여기에서 억압과 착취, 갈등의 문제들이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아니, 은혜를 흘려보내주셨습니다. 저 높은 곳에서 이 낮은 곳으로... 그게 십자가의 사랑이고,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금 높여 주십니다. 높아지려 해서 높아진 것이 아니라, 낮아짐을 통한 높이심을 경험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이 바로 이러한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입니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예수님의 삶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도 보면 예수님의 삶에 대해 간략하게 잘 정리가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6절에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분이다.” 이어서 7절입니다. “종의 형체를 가지사” 8절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6절에서 8절까지의 예수님의 모습을 한 마디로 하면 이겁니다.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저 위에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계실 수 있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신 것이 예수님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완전히 낮아질 수 있는 제일 바닥까지 낮아지신 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순절 기간을 지내고 있는데, 이 사순절 기간이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낮아지심,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심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은 “위에서 아래로” 여기서 끝이 아니라, 다시금 “아래에서 위로”의 삶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9절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이어서 10절입니다.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절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십자가 형틀을 받는 죄인의 자리까지 낮아지신 것에 그치지 않고, 다시금 위로 위로 위로 향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높이시고,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주라 칭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절망이 아니라, 소망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심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함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삶은 한 마디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의 삶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만의 모습인가? 바라기는 예수 믿는 우리들의 삶이 이러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예수님의 낮아지심,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이심,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의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면서, 우리 역시 예수님과 함께 낮아질 때에, 예수님과 함께 높아지는 삶을 살고자 소망하는 시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구원의 상징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상징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기독교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친목 공동체에 불과해집니다. 그런데 항상 십자가를 바라보다보니까 십자가의 의미가 퇴색되어져 갈 때가 많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안에 담겨진 깊은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십자가뿐입니까? 성경을 읽으면서도, 기도를 하면서도, 예배를 드리면서도,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안에 담겨진 깊은 의미보다 다른 주변적인 것들에 오히려 관심을 더 기울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십자가는 그냥 하나의 상징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 앞에 똑같은 십자가가 달려 있는데, 바라보는 사람의 신앙이나 영적 상태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어떤 분은 밤새도록 세상적으로 놀다가 새벽녘에 불 켜진 교회 십자가를 바라보고, 회개함으로 믿음을 회복한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십자가 불빛 때문에 숙면에 방해가 된다고 민원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똑같은 십자가를 바라보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의 은혜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찔림의 마음을 갖게도 하고, 어떤 이들은 왜 이리 밤에 십자가 불빛이 많냐며 불평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함께 한 우리들은 십자가 속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희생, 우리 자신의 죄악됨. 여기까지는 일반적입니다. 예수 믿는 자로서 일반적인 십자가를 마주하는 자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십자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 예수님 지신 십자가가 있는 것처럼, 내게 주어진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믿음의 백성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게 주신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 결단이 우리에게 있어지길 바랍니다. 내 가정 가운데서 내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 있습니다. 내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사회 속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고난과 죽음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 주어진 주를 위한 헌신의 상징입니다. 예수님 짊어지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의 십자가, 내게 허락된 사명을 깨달아 알고, 그 사명 감당하고자 결단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 안에 깊이 새겨지는 은혜가 이 사순절 기간에 있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아픔입니다. 

벌써 꽤 된 영화인데,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아마 보신 분들이 많이 계실텐데, 영화가 개봉될 당시에 많은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 죽으심, 부활에 관한 내용이 담긴 기독교 영화인데, 처음에는 기독교 단체에서 상영을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이유가 뭔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너무나 잔인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렇게 리얼하게 표현했다고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그 영화에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성화를 보면서 잔인함을 느낀 적이 있나요? 나를 위해 죽음의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의 아픔을 깊이 있게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마저도 너무나 아름답게 생각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야말로 아픔이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성화에는 그렇게 표현되지 않지만, 십자가형은 완전히 발가벗겨서 죽을 때까지 메달아 놓는 극심한 고통과 치욕의 형틀이었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예수님의 속옷까지 제비를 뽑았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극심한 치욕과 고통, 아픔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때, 정말 아플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아파도, 아무리 아파도 십자가의 고통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나는 낫기 위해서 아픈 것이지만,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아픈 것이거든요. 비교가 안 됩니다. 내가 이 아픔을 통해 나을 수 있다, 살 수 있다는 것과 내가 이 아픔을 통해 죽는다는 것과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 아픔이 나를 살리는 아픔이냐? 이 아픔이 나를 죽이는 아픔이냐?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은 도대체 왜 그런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셔야 했는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함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픔은 단순한 육체적인 고통만이 아니었습니다.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달린 그 치욕과 수치심. 자신을 믿고 따르던 제자 중 한명이 자신을 팔아넘긴 것에 대한 깊은 배신감. 게다가 자신을 따라 생명까지 바치겠다던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끝까지 따라온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자신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모습을 다 감내해야 했던 마음의 아픔.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며 마음속에 담겨진 수많은 상처를 절규로 토해낼 수밖에 없었던 그 심정까지.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이 모든 아픔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때로는 우리도 이러한 아픔 가운데 던져질 때가 있습니다.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육체적인 고통, 사람들 간의 관계 가운데 생겨나는 배신감이나 상처, 하나님조차 나를 버린 것 같은 영적인 낙심의 마음. 오늘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 모든 아픔을 다 주님 앞에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질병으로 고통 받은 사람의 고통을 누가 가장 잘 알아줍니까? 같은 고통을 당한 사람입니다. 배신감의 상처를 누가 위로해줄 수 있습니까? 똑같은 아픔을 당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우리가 이 땅에서 겪는 수많은 아픔의 양샹들을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다 경험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아픔을 주님 앞에 고백할 때에 모든 문제들을 어루만져 주시고, 보듬어 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십자가는 아픔이지만, 그 이후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아픔, 상처, 고통의 문제들.. 지금은 내게 아픔이지만, 하나님께서 회복의 때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십자가 아픔을 넘어서 부활의 영광에 오르신 예수님! 그 예수님을 바라보며, 모든 아픔을 넘어서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겨진 가장 큰 의미 중에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내가 어떤 노력이나 공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주어진 선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장 큰 은혜인 줄 믿습니다. 모든 고통과 수치와 아픔, 죽음까지도 예수님께서 당하시고, 우리는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것. 이 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대에 가장 잘 표현하는 말씀이 시편 103편 10절과 11절에 나옵니다. 우리 한 번 찾아서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103편 10절과 11절입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그대로 처벌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악을 따라 그대로 갚지 아니하신다. 공의의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사랑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은혜죠. 사람들 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보십시오. 내가 저 사람에게 분명 무언가 잘못을 했는데, 그냥 넘어가주는 것. 그럴 때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가 분명 지은 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아무 말 없이 넘어가주는 것.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 앞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가장 잘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가장 잘 감사하는 방법은, 나 역시 그 사랑을 세상 가운데 나누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나에게 내려온 사랑, 그것이 나를 통해 두 팔 벌려 좌우로 펼쳐지는 것, 그게 십자가의 사랑이지 않습니까?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주변에 나누는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확장시켜나가게 됩니다. 그게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고, 그게 은혜를 더 크게 만드는 것이고, 그게 십자가 사랑을 온전히 내 것으로 소유하는 모습인 줄 믿습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하나님 베푸신 은혜를 깊이 묵상하며, 그 은혜를 세상 가운데 전할 수 있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9-11-06 14:37:16 교민뉴스에서 이동 됨]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9-11-06 14:51:56 기독교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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