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6) 부활의 생명력을 지닌 교회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6) 부활의 생명력을 지닌 교회 <마가복음 16:9~20 >

일요시사 0 762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주일이면서 우리 뉴질랜드광림교회 창립 24주년 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예수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이 날을, 또한 교회 창립을 기념하는 주일에 지키게 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인 줄 믿습니다. 함께 부활의 소망과 교회 사랑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이 시간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이 부활의 아침에 하나님께 예배 할 때에, 예수 다시 사심의 기쁨과 감격과 감사가 우리의 심령에, 우리 가정에, 우리 일터에, 우리의 걸음이 닿는 모든 것에 함께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부활주일, 더불어 창립기념주일에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부활의 생명력을 지닌 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어느 교회인가요? 우리가 지금 함께 예배하는 이 곳 뉴질랜드 광림교회가 바로 부활의 생명력을 지닌 교회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 뉴질랜드 광림교회가 부활의 생명력을 지닌 교회로서, 우리 삶의 자리에, 우리가 거하는 세상 가운데, 부활의 생명력을 전하는 사명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 부활의 이 아침에, 내가 부활의 생명력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교회가 부활의 생명력을 지닌 교회로서, 나아가 그 생명력을 세상에 전할 사명을 가진 자로서,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 그 앞에 서는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단연코 믿음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많은 논란이 되고, 반박을 받았던 것 중에 하나가 예수님의 부활, 다시 사심이었습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가 있느냐?” 이러한 반론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내에서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어떻게 죄악 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느냐? 아마도 예수님은 환상으로 사람들에게 보이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십자가에 달린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비슷한 사람을 데려다가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기절하셨다가 다시 깨어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십자가에 달리긴 하였지만, 제자들에 의해서 몰래 빼돌려져서 저기 어느 다른 나라에 가서 숨어서 살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교회 밖에서, 심지어는 교회 내에서도 계속 되어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말합니다. “어떻게 죽었던 사람이 살아 날 수 있느냐? 증거를 대봐라.”

 

여러 가지로 부활의 증거들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을 향한 나의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도 보십시오. 11절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이어서 13절입니다.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마리아에게 보이신 예수님,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전하는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 저들이 가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전하는데,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13절 표현을 보세요.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당연히 믿지 않을 줄 알았다는 듯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14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죠.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11절에서 14절까지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고 쭉 나가고 있죠. “믿음”입니다. 부활의 역사성, 중요하죠. 부활의 결정적인 증거, 찾을 수 있으면 좋겠죠. 하지만 그 모든 게 우리의 믿음을 더하게 하거나 자라게 하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큰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받았기에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한 믿음이 있기에 우리가 뉴질랜드 광림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 교회가 지난 24년 전에 세워졌는데, 당시귀한 성도님들의 수고와 헌신과 기도가 있었습니다. 광림교회 본당에서의 아낌없는 지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24년의 세월 속에 기쁨도 있었고, 아픔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입니다. “믿음으로 앞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셨지만, 이제는 부활의 새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더 이상 무덤을 들여다 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새역사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소망을 품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지난 과거의 일들에 묶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힘들어하시거나 아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은 단 하나, “믿음의 부재”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단 하나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라.” 

오늘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력이 임하였습니다. 우리 뉴질랜드 광림교회도 부활의 생명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무덤에 더 이상 머물 것이 아니라, 부활의 생명력 있는 역사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내게 허락하신 그 확실한, 그 견고한 믿음으로 나아가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증거입니다. 

오늘 9절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러자 마리아가 어떻게 합니까? 10절이죠.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가서 부활의 소식을 전합니다. 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시골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십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어떻게 합니까? 13절입니다.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가서 부활의 소식을 전합니다. 오늘 막달라 마리아와 두 제자는 모두 예수님을 만나고 즉시로 가서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합니다.  

 

마태복음 28장 8절에 보면 여인들이 무덤에서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나서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제자들에게 예수 부활의 소식을 전하려고 달려갔다고 말씀합니다. 다 똑같은 반응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부활의 아침, 예수 부활의 기쁨을 믿음으로 받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증거 하는 것이죠. 증인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증인된 삶을 살 것을 당부하고 계신데, 여기 보면 복음의 증인 된 삶, 증거자로서 서기 위한 다섯 가지 명제가 나와 있습니다.

  ①첫째는 “온 천하에”, 복음을 증거함에는 장소의 구애가 없습니다. 어디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합니다. ②둘째는 “다니며”입니다. 복음은 앉은 자리에서 전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다니며” 어디로든지 다니며 전하는 것입니다. ③셋째는 “만민에게”, 너 나 할 것이 없이 모든 사람이 다 복음증거의 대상입니다. ④넷째로, “복음을”입니다. 다른 걸 전하는 게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복음이 뭔가요? “예수 십자가 부활”입니다. ⑤다섯째, “전파하라.”입니다. 전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전하는 것입니다. 그가 믿고 돌이키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우리의 책임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16절에 말씀합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고 안 믿고는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하지만 전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는 거죠. 로마서에도 말씀합니다. “전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찌 들으리요.”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듣고 돌이킬 수도 있는 것이지, 전하는 사람이 없으면 아예 믿음의 길 자체가 막혀버리는 것입니다. 그 전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정말 감사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듣는 자가 아니라, 지금 전하는 자의 자리에 서 있다는 것.” 이게 엄청난 감사거리입니다. 

  

오늘도 보세요. 예수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데,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한결 같이 다 못 믿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오늘 14절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찾아오셔서 꾸짖으십니다. 왜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죠. 믿음을 갖는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믿음을 가지셨잖아요. 믿음을 가지고 구원의 자리에 서서, 예수 부활의 이 아침에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죠.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부활의 증거자로, 증인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부활”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뉴질랜드 광림교회가 24년 전에 이곳에 세워진 목적이 무엇인가요? 교회의 목적은 함께 모여서 예배하며, 나아가 복음 전하는 겁니다. 특별히 한국 땅을 떠나서 머나먼 이 곳 뉴질랜드에 이민 와서 정착해서 살면서, 또는 학교 교육 때문에 잠시 머물면서, 여러 가지 힘겨운 상황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서로 힘들고 어려운 것들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주의 사랑으로 하나 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받아들이고, 함께 믿음생활 하면서 천국의 소망 가운데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 교회에 주어진 사명이요, 이 땅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주어진 사명이며, 지금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라고요? 부활의 생명력을 지닌 교회입니다. 이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전하는 겁니다. 증거하는 겁니다. 그러면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우리 교회에서 함께 행복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복음의 증거자로 쓰임 받아 예수 부활의 기쁨을 전파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표적입니다. 

17절과 18절에 보면 믿는 자의 삶 가운데 임하는 기적의 역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니라.” 무엇을 믿는 자입니까? 앞서 말씀하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그것을 증거 하는 삶을 살고, 그 삶을 살아갈 때에 이러한 표적이 뒤따를 것을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가서 귀신을 내어 쫓고, 병 고치는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예수님 부활 승천 이후에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이 병든 사람을 거리로 메고 나와서 혹시 베드로가 지나가는 그 그림자에라도 병든 자가 덮이게 하려고도 합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 받은 바울도 가는 곳마다 기적과 치유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심지어 병든 사람에게 바울이 쓰던 앞치마나 손수건만 올려놓아도 병이 치유되는 역사도 일어납니다.   

 

그런데 오늘 17절과 18절의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모든 상황에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누구에게나 똑같이, 동일한 역사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맞지 않습니다. 오늘 믿는 자에게 일어나는 표적은 그야말로 표적입니다. 표적이라는 것은 믿는 자에게 임하는 성령의 역사를 증거 하는 하나의 수단이죠. 그렇기에 사람과 환경과 상황에 따라 다 다르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 믿는 자에게 약속하신 표적의 내용은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주시는 말씀은, 믿는 자에게 표적이 반드시 임한다는 것, 그것이 축복이든, 은사든, 재능이든, 상황이든, 우리 믿는 자에게 믿는 자로서의 합당한 표적이 예비 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을 가지고 주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반드시 그에 합당한 표적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위해 충성할 때에 임하는, 합당한 은사와 재능, 그것이 바로 나에게 임할 표적입니다. 당연한 믿음의 결과입니다.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내 개인적인 삶 가운데, 가정 가운데, 자녀들의 앞길에, 나의 소원과 기대와 간구 가운데, “믿는 자에게는 이러한 표적이 따르리니.” 하나님의 복된 증표가 있어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금 부활하셔서 천군천사들의 환영을 받으며 날아오르셨습니다. 우리도 이 땅의 죽음과도 같은 아픔의 현실이 있을지라도, 실제로 육적인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지라도 예수님처럼 날아오르게 될 그 날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게 바로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의 모습입니다. 이게 바로 부활의 소망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세상에 전파하며, 믿는 자의 표적을 증거할 사명을 지닌 우리 뉴질랜드 광림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또한 금년에는 특히 기독교의 가장 귀한 절기인 부활주일과 교회 자체로서 가장 귀한 절기인 창립기념주일이 같은 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번 2019년에 우리 교회를 향해, 우리 모든 성도님들을 향해 계획하신 특별한 은혜가 있음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이 역시도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의 표적인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로 하여금 이제 부활의 생명력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라는, 부활의 증인된 삶을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뜻인거죠.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 우리 뉴질랜드 광림의 제단을 허락하신 주님, 우리 주님과 늘 동행함으로 생명의 역사를 이루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9-11-06 14:37:16 교민뉴스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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