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7) 무엇을 마셔야 하는가?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7) 무엇을 마셔야 하는가? <에베소서 5:15-21>

일요시사 0 863

얼마 전 한국의 매스컴을 뒤흔들어 놓았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은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경미한 사건 정도로만 여겨지던 것이 아직도 그 열기가 식지 않고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커다란 사건이 되었습니다. 바로 버닝썬 사건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보는 내내 눈살이 찌푸려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의 존재를 너무 잘 드러내주는 것 같아 씁쓸했습니다. 지금 버닝썬 사건뿐만 아니라 김학의 사건 다들 아시나요? 또 얼마 전 뉴스를 보니까 고 장자연 사건을 재조사 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밖에도 뉴스를 틀기만 하면 돈, 권력, 성에 관련된 문제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 많은 사건들을 접하는데, 저는 사람들이 다들 무엇인가에 너무 심각하게 집착하고 의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의지해서 자기 안에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을 하염없이 매꾸려하는 듯한 느낌이 든 것입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왜 사람들은 이토록 집요하리만큼 무엇인가를 의지하고 집착하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이 들었습니다. 결국은 그 모든 것을 볼 때에 한가지 드러나는 진리는, 인간은 무엇인가를 의지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인간은 다른 무엇인가에 지속적으로 의지하려는 경향성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무엇인가를 의지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여러분, 인간은 어떻게 창조되었습니까?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이던가요?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재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존재입니다. 무슨 목적입니까? 이사야 43장 21절에서 말씀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들로 창조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존재들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속성을 가진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실제적인 모습만 보더라도 바로 드러납니다. 그것이 돈이던, 사람이던, 가정이던 아니면 그밖에 무엇이던 우리는 의지할 대상을 끊임없이 찾습니다. 그 속에서 내 안에 공허와 빈 공간을 채워줄 안정과 채움을 얻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 갈망이 채워질까요? 채워질 줄 알았던 갈망은 기대와는 다르게 너무 쉽게 사그라들고 이윽고 다시 더 큰 갈망이 찾아오게 되지 않던가요? 이는 마치 영적 갈수증 환자와도 같습니다. 수가성 여인과 같이 계속해서 의지할 곳을 찾고 삶의 만족을 추구하지만 결국은 바닷물을 퍼먹는 것과 같이 채워지지 않고 계속해서 공허함을 느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버닝썬 사건이 어찌 그들만의 문제이겠습니까? 그 관계자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연예인이기 때문에 사건이 이토록 부풀려진 것이지 그 밖에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겠는가 말입니다. 이들의 목적은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결국은 영원히 의지할 곳을 찾아 채워짐을 경험하고자 갈망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만족이지요. 이렇듯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의지하려는 속성을 가진 인간의 모습은 인간이 하나님께 창조되었음을 증명합니다.

 

아마 이곳에 있는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의지하려 하는 속성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 공허함으로도 표현됩니다. 그렇다면 한번 되돌아보며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공허함이 찾아올 때, 그 의지하려 하는 속성을 어디로 향하고 계십니까? 무엇을 의지하려 하고 계시는가 말입니다. 목마름이 찾아올 때에, 공허함이 나를 사로잡을 때에 나의 발은 어디로 향하며, 나의 눈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으며, 나의 입술은 누구를 부르고 있는가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문제의 해답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딱딱하리만큼 이분법적으로 두 부류를 나누고 있습니다. 한 부류는 지혜 없는 자의 부류이고, 다른 한 부류는 지혜 있는 자의 부류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실 때에 이곳에 계신 저와 여러분은 지혜 있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본문 말씀에서 지혜 있는 자는 어떠한 모습인지, 또 인생의 공허함이 찾아올 때에,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채워야할지에 대해 고민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을 의지하라

 

오늘 본문 말씀 15절의 말씀을 보시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여기서 바울은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을 이야기 합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지혜 없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그 뒤에 17절 말씀에도 보시면 비슷한 구분을 하는데, 초반절에 보시면 뭐라고 합니까?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마지막으로 18절에도 보시면 비슷한 의미에서 두 개의 구분을 합니다. 하나는 술 취하는 것, 다른 하나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이들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합니다. 지혜 없는 자, 어리석은 자, 술 취하는 것. 반대로는 지혜 있는 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 어떠신가요? 바울 사도의 의도를 아시겠습니까? 15절에서 말합니다.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라’ 이 말씀의 숨은 뜻을 쉽게 풀어보면, 너희가 지금 잘못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헛된 곳에 가서 목마름을 채우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5장 전체에서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생의 공허함과 목마름이 찾아올 때, 어리석은 자와 같이, 지혜 없는 자와 같이 엉뚱한 데 가서 기웃거리면서 해갈하려고 하지 말고, 정말 채워짐이 있는 곳으로 오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와 아주 유사한 말을 한 구약의 선지자가 있습니다. 바로 이사야인데요, 이사야서 55장 1절과 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여기서도 말씀하는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왜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해 수고하느냐’ 너무 적나라한 지적 아닙니까? 왜 자꾸 엉뚱한 곳에 기웃거리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실 때, 예수님께서도 매우 유사한 말을 하신 구절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요한복음 7장 37절과 38절입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목말라서 여기 기웃거리고, 저기 기웃거려도 자꾸 더 갈증만 가증되었었는데, 예수님께 나아갔더니 밖에서 채워지는게 아니라 내 속에서 강이 흘러넘치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진리를 모르기에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이곳저곳을 방황하며 점점 더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지 않습니까? 이미 진리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조금 위에 8절 말씀에 보시면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이전에는 어두움을 사랑했지만, 이제는 빛을 아는 자가 되었고, 빛이 없으면 갈 수 없는 존재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한다는 것은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세상에 나가 세상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메달리는 것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생수가 내 속에서 솟아나는 은혜입니다. 찬양할 때, 기도할 때, 말씀을 들을 때, 내 속에서 솟아나는 힘과 생명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여기에 모인 저와 여러분은 인생의 목마름이 찾아올 때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께서 더 채우시기를 포기하지 않고 구하시는 모두 되시길 소원합니다.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을 때 세상 사람들이 세상의 것으로 조금 더 조금 더를 외치듯이,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 더 채워주시길, 갈증을 더 해소해 주시길 간구하실 때에 저와 여러분에게 영적 해갈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시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두 번째로, 때를 분별하라

 

사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은 잘 알지만 삶의 고난이 우리를 끊임없이 가로막을 때 어쩔 수 없이 지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해답이 있을 법도 한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고난이 찾아올 때는 우리의 마음을 쉬이 놓아주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의 삶에서 허락하시는 고난은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 더 하나님께 가려고 하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려 하는 것을 가로막을 때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고난을 주시는지 하소연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서 질문하게 됩니다. ‘도대체 왜 고난이 이토록 많을까?’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때가 악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16절을 보십시오. 여기에서 말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여기서 때가 악하기에 세월을 아끼라는 말에는 세상의 끝날, 곧 종말이 임박해 있음이 전제가 되어 있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신 본문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십니다. 이것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께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그 이후의 세상의 끝 날에 무슨 징조가 있을지에 대해 다급하게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길 거짓 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난리와 난리 소문이 들려지고,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전쟁이 일어나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인데,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라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고, 환난에 넘겨지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할 것이라 말씀하시고, 또 많은 사람이 실족해서 서로 미워하며 교회 안에 사랑이 점점 식어지게 된다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들이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일어나게 될 징조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뉴스와 매스컴을 통해 소식이 전해질 때면 예수님의 이 말씀이 점점 더 실감이 납니다. 이단들이 판을 치고, 이슬람 테러와 기근 지진, 교회 안에 사랑이 식어져가는 모습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지막 때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4장 6절에서 이러한 일들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혼란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러한 환난은 없어져야 하는데 오히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이러한 환난과 고난이 있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이 바로 때가 악하다는 것과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할까요? 악한 영의 세력이 멸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는 것은 악한 영의 세력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이 가까워진 어둠의 세력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마지막 발버둥을 칠 것입니다. 마지막 발악을 하면서 한명의 영혼이라도 더 하나님께 멀어지게 하고, 구원을 얻지 못하게 발버둥을 칠 것입니다. 그렇기에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때는 점점 더 악하며, 환난과 고난이 가증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그 사실이 우리를 좌절시킬 순 없습니다. 왜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약속을 주십니다. 마태복음 24장 13절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때는 악해지고, 어둠의 세력은 최후의 발악을 할테지만,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는 어떻게 견뎌야 할까요? 16절에서 세월을 아끼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원어적으로 풀어볼 때에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때가 악하여 많은 고난과 환난이 우리 앞을 가로막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약속 굳게 붙드셔서 끝까지 견디심으로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끝으로, 성령충만함을 받으라

 

지금까지 본문 말씀을 통해 보았던 것은 때가 악하고 마지막 때가 가까웠기에 고난과 환란이 점점 더 몰려와 우리의 목마름이 심화될 때에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것만이 지혜로운 자의 모습이며, 그 길만이 참된 채움의 길임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때가 악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려 하지만 사실상 실제의 삶에서는 좌절하게 될 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리 되내이고 되내어 보지만, 좀처럼 우리의 마음과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이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쯤에서 우리는 앞선 말씀에서 우리의 목마름이 왜 해결되지 않았는지, 그리고 우리를 어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이유를 알았다면, 이제는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8절 말씀에서 그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여기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그 다음 뭐라 말씀하십니까?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이 말씀 바로 전에 한 단어에 집중해 보길 원합니다. 무슨 단어가 나옵니까? ‘오직’입니다. 오직이 무슨 의미인지는 다들 아실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유일한 방법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악한 때에, 어둠의 세력은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나락으로 떨어뜨리고자 발악을 하는 이 악한 때에 그 유혹에 취해 세상 이곳저곳을 기웃거려봐도 우리의 목마름을 채울 수가 없는데,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만이 모든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일 때!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충만함을 받는 것! 이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직 성령 충만을 입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시면 성령 충만을 받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기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으로 기뻐하셨던 모습이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성경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던 이들을 볼 때, 그 사례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들의 결과는 모두 동일합니다. 그들 가운데 성령 충만함 가운데서 인생을 허비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고, 역사에 길이 남을 공적을 남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았던 것은 성령이 충만한 때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악한 때에, 삶의 목마름이 점점 더 심화될 때에 그 목마름을 해결하고 생명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여 지는 길 뿐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성령 충만함을 입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미 다 경험하셨듯이 기도할 때 맺어집니다. 찬양할 때 맺어집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맺어집니다. 결국 언제 성령충만함이 맺어지는 것일까요?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때 성령충만함이 맺어집니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땅의 것을 구하기 이 전에 나의 생명을 회복시켜줄, 나의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9-11-06 14:37:16 교민뉴스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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