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36); 내가 누구이기에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36); 내가 누구이기에 <출애굽기 3:11~12>

일요시사 0 888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유명한 기독교고전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형식적인 신앙의 틀 속에 갇혀버린 이들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변화의 결단을 하게 되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하나의 구호를 붙잡고 삶을 변화시켜나가는 모습을 담은 책입니다.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늘 질문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자리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교회 생활을 하고, 사회생활을 해나가면서 늘 질문하는 겁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것인가?” 그리고 이 질문 안에는 우리의 믿는 자로서의 정체성이 담겨집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들을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자신의 일을 감당할 사람을 세우십니다.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을 품고 사명을 감당해야 할까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믿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과 사명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 내가 뭐라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가? 나는 그냥 집사일 뿐인데요, 나는 그냥 한 평신도일 뿐인데요, 나는 그냥 권사일 뿐인데요.. 맞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을 전하고 있지만, 저도 그냥 목사일 뿐입니다. 다 똑같습니다. 별 대단할 것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는 순간 하나님의 역사를 위한 선한 일꾼으로 쓰임 받게 되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도 보십시오.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11절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 “아니, 하나님! 내가 누구이기에, 내가 뭐라고 이런 큰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나중에 보면 그런 말도 나오죠.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나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 잘 못 봤다는 겁니다. “아니, 내가 누구라고..” 겸손의 표현이 아닙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황망함까지 담긴 표현입니다.

  

그럼 모세가 누구일까요? 모세의 내가 “누구이기에”라는 말 가운데는 모세의 흔들리는 정체성이 담겨 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거예요. 히브리인지, 애굽인인지? 종인지, 왕자인지?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은 도망자요, 늙은 양치기요, 별로 내세울 게 없는, 과거의 영화로웠던, 혈기가 넘쳤던, 자신 만만 했던 그 모든 모습들이 다 무너져버린 나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모세는 실패한 모습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자기 자신만을 믿고 민족해방을 이루어보고자 하는 열망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남은 것은 살인자로 쫓겨난 죄인입니다. 과거의 자신감이나 혈기가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조용히 양을 치고 있습니다. 아마 40년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다면 “내가 누구이기에” 이 말에 앞서 “하나님! 잘 보셨습니다. 제가 가야죠.”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나섰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40년간 장인의 양을 치면서 모든 세상적인 자신감과 힘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정체성까지도,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과 목적까지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 그 때 하나님께서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마치 광야의 가시덤불처럼 쓸모없는 존재와도 같은 모세의 가슴에 뜨거운 불을 지펴주십니다. “가라! 너로 내가 압제받는 나의 백성을 해방시켜야겠다.” 모세가 묻습니다. “하나님! 제가 누구이기에 그런 큰일을 맡기시나요?”   

 

 그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우리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이 짧은 한마디에 모세를 향한, 또한 이 자리에 함께 한 우리 믿음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모세를 향한 대답 속에 담겨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히 세울 뿐만 아니라, 그에 합당한 삶으로의 변화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첫 번째, “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의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사업과 직장과 학업과 모든 삶의 순간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모세의 “내가 누구이기에”라는 물음에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12절 초반부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우리 믿음의 백성들, 하나님께 선택 받은 백성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아브라함을 향해서도 말씀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 이삭의 삶도 보면, 우물 파고 빼앗기고, 또 파고 빼앗기고, 그러다가 르호봇이라는 더 넓고 좋은 우물을 얻었을 때에, 전에 우물을 빼앗던 이들이 와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야곱도 보십시오. 형의 눈을 피해 도망 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목인 얍복강에서 하나님께 죽기 살기로 매어달리며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후에 세겜 도성에서의 아픔을 겪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야곱을 벧엘로 부르시고, 다시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 요셉도 마찬가지예요. 요셉의 삶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의 증거를 드러낸 것을 보게 됩니다.

  

수많은 믿음의 인물들, 단 한사람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룸에 있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통해 역사를 완성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모든 고백의 결정판이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이 말 한 마디가 얼마나 큰 힘과 능력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 목사님은 임종 직전에 자신의 일생의 삶을 돌아보면서 이러한 고백을 올려드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를 자녀 삼아주시고,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세상 모든 만물의 창조주가 되시고,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다. 함께 하심의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신다.” 그러면 한 편 마음에 평안함을 주고, 담대함을 주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너무나 두렵고 떨리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정말 나 자신을 부끄러움을 고백할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우리의 연약함이 있을지라도, 우리의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우리의 죄악됨이 있을지라도, 오히려 감싸 주시고, 안아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힘 주시는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우리 성도님들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삶으로 증거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두 번째, “나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다.” 

 

 믿음의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사명이 있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의 사명이 있고, 우리 성도님들은 주어진 직임과 직분에 따른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 12절 중반절에 말씀합니다.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 오늘 모세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호렙에서 모세를 부르신 후에 “내가 누구이기에”라는 모세의 물음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낼 자다.” 모세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오늘 본문에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입니다. 그것도 출애굽과 광야 40년까지입니다. 요단을 건너는 것은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각자에게 주신 사명이 있고, 그 사명의 시작과 끝이 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명이 멋져 보인다고 해서 우리가 모세의 사명을 감당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모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세가 위대한 지도자였지만, 그럴지라도 그 사명은 광야의 느보산까지였습니다. 거기까지. 

 

 다윗도 보세요.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 주의 사명을 잘 감당하였지만, 그의 일평생의 소원이었던 성전건축은 아들 솔로몬 때에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성전건축을 준비하는 것까지고, 직접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예배를 드리는 것은 솔로몬의 몫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예수님이 감당하신 십자가를 우리가 동일하게 감당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예수님에게 주어진 몫이었습니다. 

 

오늘 모세에게 주신 사명도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까? 그럼에도 마음 한 편에 뜨거움이 있는 겁니다. 동족들을 구원하는 그 역사적 사명, 지난 40년 전에 내 힘으로, 내 혈기로 하려다 실패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벅찬 감동이 있는 거죠.  그렇기에 모세가 결국 그 사명을 감당하고자 애굽으로 돌아가서, 모든 역사를 이루어나갈 때에, 두렵고 자신감 없던 모세, 나는 말 주변도 없고, 부족하다고 그렇게 망설이던 모세는 사라지고, 능력의 일꾼 모세만 보여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뜨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들, 때로는 그것이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로 나를 힘들게 할 때도 있습니다. 부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피곤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통해 인류 구원의 벅찬 역사가 실현된 것처럼,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 우리에게 맡기신 그 사명 안에도 동일한 크신 축복의 역사가 담겨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명 감당함을 통한 뜨거운 감격과 감동이 우리 안에 새겨질 때,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넉넉히 짊어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 속에 담겨진 기쁨과 소망과 감격이 우리 안에 뜨거운 열정으로 새겨져, 주신 사명 힘써 감당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끝으로 세 번째, “나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할 터이니 너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2절 후반부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뭔가요? 예배입니다. 

 

 오늘 12절 말씀만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에 담긴 본질적인 이유가 바로 예배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음껏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거하는 축복의 삶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도 바로 앞에 설 때마다 출애굽의 이유를 반복적으로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하러 갈 것입니다.” 출애굽의 제1목적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이라는 거죠. 

 

 예배란 말 그대로 하나님 앞에 예를 갖추어 엎드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솨하” 뜻은 “납작 엎드리다.”입니다. 마치 임금 앞에 신하가 납작 엎드려서 임금의 명을 받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죠.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하물며 이 땅의 임금 앞에서도 그런 모습인데,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하나님 주시는 예배의 감동과 감격에 내 온 마음을 다해 감사로 화답하여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예배가, 우리의 앞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릴 모든 예배가 그런 예배, 하나님 받으실만한 예배, 내 생명과도 바꿀만한 거룩한 산제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단코 예배입니다. 신앙생활은 예배에서 시작됩니다. / 교회의 모든 봉사는 먼저 예배드리고 하는 겁니다. / 주의 일을 위해서, 세상에서 섬기고 헌신하는 모든 것 역시 예배가 먼저 선행되어야 합니다. / 또한 예배 잘 드리고, 은혜 충만함으로 복음을 전해야 바른 전도가 됩니다. / 언제나 어디서나 예배하는 삶이 먼저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신앙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범한 것입니다. 변함없는 것입니다. 재미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일상적인 겁니다. 주일이면 자동적으로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있고, 수요일에 성경공부로 모이고, 목요일이나 금요일 되면 당연히 속회로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그게 일상화되는 것. 그것만큼 귀한 게 없습니다. 밥이 앞에 있으면 자동적으로 고개가 숙여지고 눈이 감겨지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반응이 오는 것. 그게 귀한 겁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 역시 변함없는 예배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뭔가 새로운 것이 귀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귀한 것, 정말 값어치 있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이아몬드가 왜 귀합니까? 금이 왜 값어치가 있습니까?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출애굽을 통해 예배의 삶을 살 것을 명령하신 것처럼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한 우리 모두를 향해 하나님께서 동일한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섬기리니” 하나님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자로서의 삶을 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믿는 자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다.” “너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다.” “너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다.” 

 

그리고 12절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의 함께 하심, 사명 감당, 예배하는 삶을 통해 “이것이 내가 너희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증거가 드러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예수 믿는 자로서 믿음의 정체성을 굳건히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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