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38); 초 월 (超越)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38); 초 월 (超越) <창세기 17:15~22>

일요시사 0 891

하루는 새벽에 기도하면서, “기도”에 대해서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벽마다 주님 전에서 기도하는데, “과연 기도가 무엇인가?” 그러던 중에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딱 주신 단어가 바로 오늘의 제목입니다. “초월” 초월이라는 말을 사전적으로 정의하면 “어떤 표준이나 한계를 뛰어 넘는다.”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데, 그걸 넘어서는 것을 “초월”이라고 합니다.

  

기도가 그런거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내가 하면 됩니다. 그럼 우리가 언제 기도합니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할 때 기도하는 겁니다. 내 힘으로는 이 정도밖에 할 수 없는데, 더 많은 것을 기대할 때에 기도하는 겁니다. 기도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 힘만으로는 부족한 것을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준비했지만, 그 이상의 결과를 소원할 때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초월”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러한 초월의 역사를 경험한 한 가정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인간적인 한계로 할 수 없는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초월” 사실 멀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지금 교회에 나와 있는 것 자체가 “초월”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새벽마다 호렙산 기도회에 참여하는 것이 “초월”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지금 예비 되어져 있는 “초월”의 역사를 위해서 한참 신앙적으로, 삶적으로 달려가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 함께 말씀을 보면서 은혜를 나눌 때에 우리 삶에 이루어질 “초월”의 역사를 바라보고 기대하고 이루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은 최선을 주십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본문에 앞서 1절에서 9절까지, 계속해서 아브라함을 향해 후손에 관한 말씀을 주십니다. 지금 아브라함에게는 사라의 몸종인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너와 네 후손” “너와 네 후손” 하시면서 후손에 대한 말씀을 주십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 이스마엘이 맞구나. 우리 생각대로 사라의 몸종 하갈에게서 자식을 얻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구나. 그런데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가르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이 18절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이 안에 담겨진 아브라함의 허탄한 마음이 느껴지시나요? “하나님! 지금 저랑 농담 하시나요? 저기 이스마엘이나 잘 지켜 주십시오.” 이게 그냥 나온 말이 아닙니다. 창세기 16장에 보면 사라와 하갈의 갈등이 나왔지요. 아브라함은 하마터면 하나뿐인 자식을 못 볼 뻔했습니다. 다시 되찾은 이스마엘을 향해 내색은 못해도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19절에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까지만 바라봤습니다. 보세요.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입니다. “하나님! 내 종 엘리에셀이 상속자입니다.”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다.” “하나님! 저 이스마엘이나 살기를 원합니다.” “아니라. 네 아내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이 상속자가 될 것이다.”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차선만을 말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계속해서 최선을 말씀하십니다. “아니라. 네가 구하는 것 그 이상을 내가 줄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이 공식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최선을 주시는 분이다.” 기도하는 데 응답이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니, 응답이 되지 않는게 아니라,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생각하죠.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나보다. 내 기도를 이루어주지 않으시나보다.” 더불어 이런 생각도 하죠. “내가 너무 과한 것을 구했나보다.” 

  

하지만 대부분은 과한 기도보다 너무 작게 구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더 큰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작은 것만 구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니라. 아니라.” 더 큰 것을 구하라고, 더 큰 것을 주시겠다고 기다리시는 겁니다. 차선을 최선보다 앞세우지 마십시오. “이 정도면 충분한데...” 스스로 제한하지 마십시오. “초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최선의 것을 구하고, 최상의 것으로 응답 받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십니다. 

 

역대하 6장 40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솔로몬이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소서.” 이어서 7장 15절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시편 116편 1절과 2절에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이 외에도 시편의 전체 말씀을 보면, 시편기자가 끊임없이 간구하는 내용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소서.”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때로 간절하게 부르짖어 기도하죠.

  

사실 소리를 크게 내고, 작게 내고는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기도에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기를 즐겨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볼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18절에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하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이삭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하나님은 이스마엘보다 더 귀한 아들 이삭을 계획하고 계셨지만, 이삭에서 끝이 아닙니다. “이스마엘에 대해서는 네 말을 들었나니.”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만족하는 그 마음까지도 품어 안으십니다. 최선의 것을 주실 뿐만 아니라, 작은 간구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 역시 “초월”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 그것이 크던 작던간에,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응답의 은혜를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은 웃음 짓게 하십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아브라함의 집에 방문하여 아들을 주시겠다는 오늘의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때 집 뒤편에서 천사들의 이야기를 듣던 사라가 18장 12절에 이렇게 말하죠.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낙이 있으리요.” 그러자 하나님의 천사들이 지적합니다. “사라가 왜 웃느냐?” 사라는 황급히 아니라고 발뺌을 하죠. “아닙니다. 제가 웃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이후에 일 년이 지났습니다. 사라는 정말 구십 세의 나이에, 아브라함 백세에 아들을 낳게 됩니다. 사라가 이번에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창세기 21장 6절입니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전에 웃지 않았다고 발뺌하던 사라는 예전에 자신이 웃었음을 만인에게 시인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아들 이삭의 이름 뜻이 바로 “웃음”입니다. 처음 시작은 허탈함의 웃음이었고, 후에는 기쁨의 웃음이 되고, 나중에는 감탄의 웃음이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바라기는 이 자리에 함께 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웃게 하시는 축복이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떻게 이런 결과가 일어났나요? 하나님 주신 약속이기에 실현된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나의 모습 때문에 의심하지 마십시오. 기도가 안 된다고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때로는 의심하고, 비웃고, 외면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기에, 부르심에 응답하여 순종했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미래를 예비하시고, 또한 이루어주십니다. 믿음 위에 굳건히 서서 하나님의 자녀됨의 권세를 붙잡고 나아갈 때에, “초월” 하나님의 놀라운 기도응답의 역사를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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