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40) 부흥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40) 부흥 <하박국 3장 2절, 17~18절>

일요시사 0 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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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부흥”입니다. 그럼 부흥이 도대체 뭘까요? 오늘 특별히 종교개혁 기념 주일인데, 종교개혁과 부흥이 어떤 관계가 있기에 제가 말씀의 주제를 이렇게 잡았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종교개혁 자체가 부흥을 위한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부흥하면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것을 생각합니다. 교회의 숫자가 많아지고, 헌금도 많아지면, 교회가 부흥되었다라고 합니다. 작은 교회였는데, 큰 교회를 건축하면 부흥되었다고 합니다. 뭐, 이게 잘못된 말은 아니지만, 정말 부흥의 본질적인 의미와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부흥을 사전에서는 이렇게 풀이합니다. “쇠퇴하였던 것이 다시 일어남” 한문으로 하면 다시 “부”에 일으킬 “흥”입니다. “다시 일으킨다.” 영어로 하면 “리바이벌”, 뜻은 “회복, 부활”이란 뜻입니다. 오늘 하박국 3장 2절에 부흥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성경 전체에서 유일하게 딱 한 번 부흥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곳입니다. 이러한 부흥의 실제적인 의미를 보면 왜 종교개혁이 부흥인가를 알 수 있게 되죠.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반박이었습니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 1506년 면죄부를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면죄부를 산 사람만의 죄가 아니라, 그의 부모 친지의 영혼도 면죄부를 사는 돈이 금고에 떨어져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옥으로부터 튀어 나온다.” 이렇게 타락한 교황과 로마카톨릭에 항의하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주장하는 것은 “다시 살아나자.” “다시 회복시키자.” 세상의 물질주의, 권력, 그 모든 것에 더럽혀지고 부패한 우리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가자.” “죽어 있던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리자.” 이게 바로 종교개혁에 담긴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부흥의 참뜻을 이루어 가자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하는 중에 우리에게도 동일한 부흥의 역사가 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죄악의 모든 무거운 짐을 다 벗어버리고, 세상 속에 때 묻은 우리의 심령이 정결함을 얻고, 세상의 가치관 가운데 흔들린 우리의 삶에 주님 주신 회복의 은혜가 있어지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 안에 부흥의 역사, 다시 살아남의 역사, 회복의 역사가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부흥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부흥은 회복입니다.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주저 앉아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게 뭘까요? 바로 회개입니다. 나의 연약함, 나의 죄악됨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 거기서부터 회복의 역사가 시작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하박국서를 보면 처음에 탄원을 합니다. 1장 2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이리까?” 이어지는 내용들을 보면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에 대한 탄식과 원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 악인들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백성들 자신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일으켜서 너희들을 칠 것이다. 악을 행하던 유대백성들 모두가 심판 받게 될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하박국이 또 탄원을 합니다. “하나님! 그렇다고 저 악한 바벨론으로 우리를 치시다니요? 하나님은 왜 악의 세력조차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그래. 저 바벨론도 결국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결국 의인들을 위함이다.” 그러면서 나오는 말씀이 하박국 2장 4절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이 하박국에게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말씀이 됩니다.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던 루터도 오늘 하박국 선지자와 똑같은 심정입니다. 하지만 정작 죄의 뿌리는 어디 있습니까? 바벨론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는 겁니다. 결국 돌아섬, 회개의 출발은 다른 이가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다른 사람은 악을 행하고, 다른 사람은 강포를 행하고, 다른 사람은 그렇게 살아도, 거기에 마음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살리는 믿음 하나 붙잡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는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 잠잠할지니라.” 내 마음이 먼저 주를 향하고, 내 걸음이 먼저 주를 향함으로, 부흥의 터전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걸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참된 가치를 붙잡아야 합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그 근본적인 이유는 당시 로마 카톨릭이 참된 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쁘시죠. 그런데 왜 그렇게 바쁘신가요? 물론 바쁠 때는 바빠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이렇게 바쁘게 일을 해야 하는지, 내가 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내가 왜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해야 하는지, 내가 왜 사업장에서 그렇게 수고해야 하는지, 내가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지. 그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참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루터 당시에 로마 카톨릭과 교인들은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겠다고, 120년에 걸쳐서 그 성당을 멋지게 짓겠다고, 면죄부를 세일합니다. 사람들은 뭔지도 모르고 거기에 휩쓸려 면죄부를 열심히 삽니다.

  

종교개혁가들이 외친 다섯 가지의 슬로건이 있습니다. 5가지 솔라로 요약합니다. 여기서 솔라는 라틴어로 “오직”이라는 뜻입니다. “Sola scriptura-오직 성경” “Sola Christus-오직 예수” “Sola gratia-오직 은혜” “Sola fide-오직 믿음” “Sola deo gloria-오직 주님께 영광”입니다. 루터와 종교개혁가들은 그냥 무턱대고 반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 기준이 명확합니다. 먼저 말씀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아니면 아닌 겁니다. 두 번째가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주가 되십니다. 세 번째는 오직 은혜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얻는 것입니다. 네 번째가 오직 믿음입니다. 루터에게는 오늘 하박국 2장 4절이 종교개혁의 기치와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직 주님께만 영광”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에 합당한 모습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루터는 이 다섯 가지 가치,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붙잡고 종교개혁의 역사를 이루어갑니다. 여러분! 무엇을 바라보시겠습니까? 무엇을 위해 이 땅의 삶을 살아가시겠습니까? 오직 말씀에 비추어,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오직 주님 주신 은혜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부흥의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정말 부흥이라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회개하는 그 순간부터 부흥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내가 돌아서서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갈 때에, 정말 참된 가치를 부여잡고 나아가면 그게 바로 부흥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부흥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부흥은 언제나 사람들을 겸손하고 낮아지게 하며, 바닥에 엎드리게 하고,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게 하며, 경외심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충만하게 만듭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나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부흥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부흥이라는 것은 어떤 숫자적인 척도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나 사랑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부흥도 똑같습니다. 내가 가던 길에서 돌이켜 주님을 바라보고, 참된 믿음의 가치를 붙잡고 나아가면 그 순간 이미 나는 부흥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는 순간 나는 이미 부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흥을 경험한 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 그 공동체가 부흥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박국 선지자의 마지막 고백도 보십시오. 본문 17절과 18절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처음에 원망과 탄원으로 이야기하던 하박국 선지자가 이제는 감사의 찬양을 드립니다. 부흥을 경험하니까, 탄식이 기쁨으로, 원망과 불평과 이해 못함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인한 감사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없어도 부흥의 은혜를 이미 누리는 것입니다.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 뉴질랜드광림교회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박국 선지지와 같이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말미암아 참 기쁨과 감사를 누릴 수 있는, 부흥의 은혜를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9-11-06 15:08:02 기독교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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