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41) 비상(飛上)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41) 비상(飛上) <누가복음 18:1~9>

일요시사 0 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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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관한 비유가 나옵니다. 1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오늘 비유에 담긴 두 가지 목적을 말씀하시죠. “항상 기도해야 한다.”는 것과 “기도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입니다. 여기서 낙심이라는 게 뭘까요? 한 마디로 추락입니다. “낙심” 내 마음이 떨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그럼 언제 낙심을 경험하게 되시나요? 뭔가 안 풀릴 때 낙심을 경험합니다. 정말 기대를 많이 했는데, 되지 않을 때 낙심을 경험합니다. 사업의 실패, 취업의 실패, 학업의 실패, 이런 저런 실패 속에서 낙심을 경험합니다. 또한 호렙산과 같은 특별기도회 기간에도 보면, 40일이 다 채워져 가는대도 기도응답의 기미가 안 보이는 것 같을 때도 낙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세상 어떤 사람도 이 낙심의 상황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 믿는 자가 다른 것은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치 말고 항상 기도함으로 새롭게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오늘 비유의 말씀을 통해 낙심치 말고 항상 기도함으로 “비상” 날아오르기 위해 필요한 기도의 자세가 무엇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도록 합니다. 

 

  첫 번째로, 담대함입니다. 오늘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과부이고, 또 한 사람은 재판장입니다. 오늘 홀로 된 여인은 마음에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여인은 경제적으로 어려움 가운데 있었기에, 제대로 된 재판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은 그저 날마다 재판장을 찾아가서 하소연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재판장의 성품입니다. 2절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 이 재판장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대략 머릿속에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이 여인은 3절에 말씀하는 것처럼 “자주 가서” 재판장 앞에 섭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처지가 어떠했을까요? 재판장이 편하게 놔두었을까요? 하인들을 보내서 내쫓으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여인은 매일 그 앞에 나갑니다. 멸시를 당해도, 치욕을 당해도, 놀림과 조롱을 당해도 그래도 매일 그 앞에 섭니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5절에 나오는 것처럼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하는 풀어주리라.” 길이 열려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어서 7절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무시하는 재판장이라고 할지라도 매일 그 앞에 나오는 자의 억울함을 풀어 줄 터인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담대함으로 주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담대함으로 주님 앞에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워서요.” 아니예요. 그냥 나오는 겁니다. 그냥 주님 앞에 서는 거예요.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길이 열렸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담대함을 갖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도 말씀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그 전까지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그 이름조차 부를 수 없었는데,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빠”를 향해 두려울 게 뭐가 있습니까? 담대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기도의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비상”의 기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간절함입니다. 본문 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재판장이 말한 내용이 뭔가요? 5절입니다.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이 재판장의 말 속에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고자 하는 내용이 숨어 있습니다. 뭔가요? 간절함입니다. “나를 번거롭게 하니...”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나를 괴롭게 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호렙산 기도회 기간에 주님 앞에 나와서 기도합니다. 왜 이른 새벽부터 주님 전에 나와서 기도합니까? 집에서 기도하면 안 되나요? 낮에 기도하면 안 되나요? 시간 좀 있을 때 기도하면 안 되나요? 물론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새벽 시간에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은 간절함의 표현입니다. 시간이나 장소보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품은 간절함입니다. 오늘 홀로된 여인은 원통함을 풀고자 집에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 편한 시간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재판장을 만날 수 있는 그 때를 찾아서 새벽이건, 낮이건, 밤이건, 가리지 않고 뛰쳐나갔습니다. 재판장에게 호소할 수 있는 그 장소를 찾아서 집이건, 재판정이건, 길거리건, 어디로든지 달려 나갔습니다. 이처럼 간절함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어떤 때나 장소에 있는 게 아닙니다.  

 

  이사야 55장 6절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가 언제인가요?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실 때가 언제인가요? 주일대예배가 아닙니다. 새벽예배 시간이 아닙니다. 호렙산 특별기도회 시간이 아닙니다. 부흥회 때가 아닙니다. 또 한 편으로는 지금 말씀 드린 모든 때이기도 합니다. 어느 시간, 어느 장소를 불문하고, 내가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그 마음, 내가 하나님을 찾겠다는 그 마음을 품는 그 때, 다시 말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을 품는 그 순간 주님을 만나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잠언 8장 17절에 말씀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찾던 한나를 만나주시고, 사무엘이라는 응답을 주십니다. 그렇게 간절히 찾던 히스기야를 만나주셔서 15년의 생명을 더하십니다. 오늘 그렇게 원통함의 해결을 위해 간절히 찾던 홀로 된 여인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간절함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이 시간 우리를 향해 간절함으로 주님을 찾고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고, “비상” 응답으로 날아오르게 하시는 은혜를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믿음의 기도입니다. 오늘 8절에 이렇게 말씀이 마무리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오늘 비유의 결론은 하나입니다. “낙심치 말고 기도하면 응답 받는다.” 불의한 재판장이라 할지라도 이 여인의 원한을 풀어 줄 터인데, 하물며 우리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마지막에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씀이 딱 끝나면 오케이입니다. 딱 좋습니다. / 그런데 마지막 한 문장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인자가 올 때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입니다. 혹은 내가 이 땅의 삶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 비유의 목적인 기도와 더불어서 해석을 하면, 예수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믿음의 기도를 올려드려야 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 말씀의 뉘앙스를 보면 믿음의 기도를 하면서 주님 만나는 날까지 살아가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면 이게 그냥 당연한 삶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고, 응답 받고, 또 다시 기도하고... 이게 우리 믿는 자의 일반적인 신앙의 모습인데, 왜 이게 어렵다는 건가요? 응답이라는 열매를 얻기까지, 때로는 내가 원한 응답의 모습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뜻하심으로 수용하는 데까지 이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이 그리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홀로 된 여인이 가진 문제는 원한이었습니다. 억울함을 해결 받고 싶은 겁니다. 그럴 때 오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억울해도, 원통해도, 낙심치 말고 항상 기도해라.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함으로, 간절함으로 나아가서 부르짖어 기도해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실 것이다.” 사람을 향하지 말고, 하나님을 향하는 것, 이게 바로 믿음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을 향하면 믿음의 기도가 되지만, 사람들을 향하기 시작하면 인간적인 욕구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라는 날개를 허락하셨습니다. 담대함으로 날개를 펼치시기 바랍니다. 간절함으로 날갯짓을 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기도의 날개를 계속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비상” 날아오르게 하시는 주의 은혜를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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