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42) 겸비(謙卑)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42) 겸비(謙卑) <누가복음 18:9~14>

일요시사 0 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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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겸비”입니다. 겸비라는 말은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한 모습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을 우리는 “성육신”이라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만물의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거죠.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겸손의 왕” 그렇다면 예수 믿는 우리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기도의 자리에 설 때에 어떤 모습으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겸비함으로 기도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10절에 오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두 사람이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얼마나 귀한 모습입니까? 

 

  그런데 바로 뒤에 그 사람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죠.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한 사람은 세리라.” 완전히 상반되는 두 부류의 사람입니다. 이 말을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적 관점으로 보면 이렇게 말 할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은 의인이요, 한 사람은 죄인이라.” 바리새인은 11절과 12절에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한마디로 아주 신실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공공연하게 죄인이라고 취급합니다. 저들은 오늘 세리의 고백처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스스로 죄인이라는 자의식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함께 기도합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이 기도하고 있는데, 기도의 자세, 기도의 내용, 기도의 모습이 다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평가를 내리십니다. 14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즉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기도하러 올라갈 때는 바리새인이 의인이고, 세리가 죄인이었지만, 사회적인 시선으로 볼 때는 바리새인이 의인이고, 세리가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의 평가는 오히려 세리가 의인으로 인정받는 역전의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겸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세의 차이였습니다. 함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인정 받는 “겸비의 기도”가 어떤 모습인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하얀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제가 하얀 기도라고 표현한 것은 있는 모습 그대로의 기도를 뜻하는 말입니다. 기도란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의 소통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을 바라볼 것도 없습니다. 내가 기도를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치 않습니다. 얼마나 진실됨으로 주님 앞에 나의 아픔, 나의 소원, 나의 간구, 나의 감사를 아뢰느냐가 중요한 거죠.

  오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보십시오. 바리새인의 기도가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사람을 향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는 토색하지 않습니다. 나는 불의를 행하지 않습니다. 나는 간음하지 않습니다. 나는 저기 저 세리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도 합니다. 나는 십일조를 드립니다.” 이건 기도가 아니라, 자기 과시입니다. 자기 자랑입니다. 함께 기도하는 세리를 향한 모욕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기만입니다.

 

  반면에 세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13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향해 눈을 들지도 못합니다. 다만 가슴을 치면서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기도합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럼 세리만 죄인인가요? 바리새인은 모든 게 다 완벽했을까요? 역시 비교입니다. “내가 저 세리보다는 낫다.” 바리새인은 이 모습을 드러내고 싶은 겁니다. “이신칭의” 우리가 잘 아는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 받는 것”도 보십시오. 믿음으로서 의롭게 되는 게 아닙니다.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겁니다. 여전히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십자가를 향한 우리의 믿음으로 보시고, 의롭다고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당당합니다. “하나님! 저는 쟤보다 신앙생활 잘 했습니다.” “저 세상에 가면 사람들에게 존경 받습니다.” “하나님! 저 꽤 괜찮지 않습니까?” 우리도 이런 바리새인의 모습을 가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다른 사람의 연약함, 부족함을 탓하면서, 정죄하면서 나는 의인인 것처럼, 나는 정말 신실한 것처럼, 스스로를 포장하고, 사람들에게 내세우고, 하다 하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까지 내가 의인이라고 자만하는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요? 

 

  하나님 앞에 설 때는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가진 세상의 직위도 내려놓고, 내가 가진 세상의 힘과 권세도 내려놓고, 혹 내가 오늘 교회에 올 때에 가졌던 짜증이나 염려도 다 내려놓고... 구약 시대 제사장이 지성소 안에 들어갈 때 보면, 자신이 입던 제사장의 옷을 다 벗고, 세마포 옷만 입고 들어갑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자신의 직위나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하얀 모습으로 서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백지와 같은 하얀 모습,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겸비함으로 주님 앞에 설 때에, 우리 삶에 채우실 은혜를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합니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오늘 바리새인의 기도는 사람을 향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지만, 정작 그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망각하고 있는 겁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합니다. 자신은 그래도 한다고 했습니다. 우상도 없애고, 하나님께 열심히 예배도 드렸습니다. 백성들을 잘 다스리려고 노력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나이가 서른 아홉 살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서른아홉의 나이에 무엇을 했는지, 특별히 기억나는 분들 계신가요? 히스기야는 서른아홉의 나이에 하나님 앞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아예 세상을 보지 않고, 벽만 쳐다보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만 바라보고 울었더니 하나님께서 15년의 수를 더하십니다.

 

오늘 세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바리새인이 무슨 기도를 하던지, 자신을 보고 어떻게 손가락질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울지 말고 하나님 앞에 울라는 겁니다. 사람들 앞에서 울면, 당장은 위로가 있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다른 곳으로 퍼져갔다가 더 아프게 나에게 돌아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들으시면, 가장 합당한 때에, 가장 좋은 응답으로, 다시 내게 돌아옴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기에 믿음의 삶은 “포기와 맡김”입니다. 그게 겸비함의 모습입니다. 내가 다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마음먹는다고 다 되는 게 아닙니다. 겸비함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맡겨드릴 때에,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은혜를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65장 24절에 보면 우리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모습이 될 만한 기도와 응답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우리가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시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사야 65장에는 하나님께서 부르기도 전에 응답하시고, 말을 마치기도 전에 들으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어떻게 이러한 기도와 응답이 가능할까요? 내가 기도의 자리에 서기 전에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이 있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모두 잘 아시는 솔로몬의 이야기만 보더라도, 물론 솔로몬이 구한 기도의 내용도 좋았지만, 그 이전에 연약한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로 드리는 일천번제, 하나님을 향한 자세가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모습이었습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그 이후에 무엇을 구해도 이미 응답이 예비 되어져 있는 겁니다. 솔로몬의 기도내용도 보면 솔로몬의 자세를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아이라 지혜가 부족하니, 백성을 잘 다스릴 지혜를 주소서.” 겸비함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이사야 65장의 말씀이나, 솔로몬의 기도와 응답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나오기 전에 이미 준비된 모습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오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갈 때 11절에 보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라고 표현하며, 세리는 ‘멀리 서서 가슴을 치며’라고 표현합니다.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이었고, 세리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의 모습일 지녔습니다. 그래서 1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돌아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런 겸비한 고백 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이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겸비함으로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 칭찬받고, 응답 받고, 또한 높임 받는 축복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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