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43) 감사의 고백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43) 감사의 고백 <레위기 23:33~43>

일요시사 0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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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성경에는 추수감사절이라는 말 자체가 없지만, 이와 관련해서 성경적인 유래를 보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절기 이름을 초막절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는 장막절이라고도 하고,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초막절의 기원은 출애굽 사건과 관련이 되는데, 출애굽 때에 초막을 짓고, 다른 말로 장막을 짓고 생활하던 그 때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더불어 수장절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것은 한 해의 농사 지은 것을 모아서 창고에 들인 후에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해의 삶을 돌아보며 감사하는 지금 우리의 추수감사주일과 가장 가까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해서, 추수감사주일의 성경적인 기원을 초막절에 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여러 가지가 섞여 있습니다. 한 해의 곡식을 거두고 감사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초막절, 미국 청교도의 한 해 동안 수확한 작물에 대한 감사의 모습, 그리고 현재 우리가 기념하는 한 해 동안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각각 다 다르지만, 결국은 그 뜻은 감사로 모아집니다. 

 

  유래에 대해서 다르게 말할 수도 있고, 추수감사주일은 미국 절기라고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농사를 짓지 않으니 나와는 상관없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안에 공통적으로 담겨진 의미, 감사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한 해 동안의 삶에 베푸신 은혜에 감사함으로 추수감사주일을 지킵니다. 오늘 이 감사의 절기를 지내면서 말씀을 나누고, 성만찬을 나누는 중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감사의 고백이 우리 안에 새겨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감사의 고백은 예배하는 것입니다. 오늘 레위기 23장은 전체가 이스라엘의 절기에 대한 규례에 대해 말씀합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 일곱 가지의 절기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절기에도 공통점이 있죠. 뭔가요? 감사입니다. 동시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예배입니다. 모든 절기마다 일하던 것을 다 멈추고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34절에 보면 초막절은 일주일 동안 지키게 되는데, 35절에 말씀합니다. “첫 날에는 성회로 모일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36절에도 말씀합니다. “이레 동안에 너희는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여덟째 날에도 너희는 성회로 모여서 여호와께서 화제를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이 모든 명령에 담겨진 의미가 한결같습니다. 모든 것을 다 드려서 하나님께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첫날과 끝 날은 어떤 노동도 하지 말고 오직 거룩한 성회로 예배만 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의 고백은 예배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백성들의 삶은 예배자의 삶이었습니다. 아마 많이 들어보셨을 거예요. “예배의 성공자가 인생의 성공자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배하고 있습니까? 오늘 초막절의 제사는 화제라고 했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불로 태워서 모든 것을 다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이러한 화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시간을 다해서, 내 정성을 다해서, 내 열심을 다해서, 내 마음을 다해서, 내 모든 것을 남김없이 불로 다 태우듯이 하나님께 온전히 올려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감사의 고백, 예배의 삶에 더 큰 감사의 일들을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두 번째로, 감사의 고백은 함께 기뻐하며 나누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감사의 절기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감사는 함께 기뻐하는 것이요,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40절입니다.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니라.”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니라.” 절기 내내 기뻐하면서 추수의 기쁨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미국 청교도들도 추수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고생과 어려움 끝에 살아남은 이들, 그리고 자신들을 도와준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함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감사의 큰 의미는 이처럼 나누는 데에 있습니다. 나누는 것만큼 기쁜 것이 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초막절은 출애굽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노예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가나안의 축복을 허락하시고, 더불어 풍성한 수확의 결실까지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함으로 모든 사람이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 때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들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에 수많은 잡족들이 함께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도 할례를 받으면 이스라엘 백성의 무리 안에 들어가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음을 또한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선민의식 하나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그 은혜에 동참하길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기쁨의 길을 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말씀에도 보면 이레 동안에 모두가 함께 기뻐할 것을 말씀합니다. 

 

  교회가 추수감사절을 지키면 이웃도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교회가 감사의 기쁨을 누리면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도 그 기쁨이 전해져야 합니다.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함께 기뻐함으로 감사의 고백을 우리 안에, 우리 가정에, 우리가 속한 모든 공동체에 나누고, 또한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감사의 고백은 새겨가는 것입니다. 오늘 초막절의 하이라이트는 실제로 초막에 거주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당시에 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막을 치고 생활합니다.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생활합니다. 그 때를 기념하면서 초막으로 집을 짓고, 일주일 동안 그 안에서 생활하는 겁니다. 그 생활은 참으로 힘들고, 불편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 지나간 날의 모습을 왜 계속 체험하는 걸까요? 43절입니다.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이라.”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대대로 새겨가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무엇을 새겨가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새겨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인도하신 그 사랑을 내 안에 새겨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 후에 성만찬을 할 터인데, 왜 절기마다 성찬을 합니까? 예수님 말씀하셨죠.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내 안에 새겨가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만찬은 전병이 아닙니다. 매년 하셨지만, 큰 빵을 우리 장로님들이 들고 계시고, 여러분들의 손으로 그 빵을 직접 찢어서 포도즙에 적셔 먹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 의미를 기억하셔야 하는데, 강단의 빵이 무엇을 상징합니까?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여러분의 손으로 직접 찢는 겁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예수님이 죽임 당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찔림,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우리 안에 새겨 넣는 것이 바로 성찬에 담겨진 의미입니다. 

  초막에 거하는 것, 힘든 일입니다. 불편한 일입니다.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치욕스러운 일입니다. 참기 힘든 고통입니다. 하지만 그 고통과 피 흘리심이 있었기에 우리가 나음을 얻었고,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우리가 생명을 얻은 줄 믿습니다. 이 안에 담겨진 사랑, 그 앞에 주를 향한 감사의 고백을 우리 안에 새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의 아픔을 우리 머리에 새기고, 예수님의 못 박힌 손과 발의 아픔을 동일하게 우리 손과 발에 새기고, 예수님의 찔린 옆구리 창자국을 우리 옆구리에 새겨가는 겁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 안에 새겨지고, 감사의 고백이 우리 안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감사의 고백, 은혜로 새겨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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