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49)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 <이사야 52:7~10 >

일요시사 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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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이 시간에는 금년에 우리에게 주어진 표어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라는 말에는 참으로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너”와 “나”를 나누지 않고, 모두를 포함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누구인가요? 바로 저와 여러분 모두를 뜻하는 말입니다. 2020년 첫 번째 주일 이 시간에 예배할 때에, 먼저는 내가 뉴질랜드광림이라는 그 울타리 속에 “우리”로 녹아드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형제 자매로 “우리”가 되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금년 한 해 우리에게 맡기신 “복음 전하며 세상에 평화를 선포하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 결단하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로, 우리 안에 행복이 넘쳐나야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뉴질랜드 광림에 속한 모든 성도님들에게 행복이 넘쳐나시길 축원합니다. 나아가 우리 교회를 지나가면서 바라보는 사람들 마음에도 행복이 깃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았잖아요. 그런데 걱정할게 뭐가 있습니까? 염려할 게 뭐가 있습니까? 인상 쓰고 화내고 살 이유가 없는 거예요. 다윗은 시편 16편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그냥 기쁜게 아닙니다. 분명한 조건이 있습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내가 지금 생명의 길을 걷고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기쁜 겁니다.

  예레미야 29장에도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재앙이 아닌 평안을 주시길 원하시고, 미래와 희망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행복을 누리면 되는 거죠. 기쁨의 서신이라는 별칭을 가진 빌립보서 4장 4절에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 말씀을 보면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뻐하기 위해서 어떤 일들을 해야 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냥 기뻐하라는 거예요.

  “예수는 믿는데 기쁨이 없어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기쁨으로 가득한 삶을 살기위한 90일 프로젝트를 시행합니다. 계속 기쁨을 연습하고 훈련하는 거예요. 예전에 감사노트를 기록하는 게 유행인 적이 있었죠. 기쁨연습도 마찬가지예요. 계속 기뻐할만한 제목을 찾아내서 의도적으로라도 기뻐하는 연습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정말 기쁨이 삶이 되는 거죠.

  그런데 저자에게 사람들이 질문을 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일들이 있는데, 어떻게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삶이란 크고 놀라운 선물을, 수박 한 덩이처럼 받으면 안될까? 달콤한 빨간색 과육만 입에 넣고, 나머지는 뱉어 내면 되지 않는가? 우울하게 씨앗과 껍질까지 씹을 건 또 무엇인가?” 아주 단순하죠. 신앙의 삶 속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보십시오.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행복과 기쁨이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소식이 들리니까 기쁜 거예요. 평화의 소식이 전해지니까 행복한 겁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 복음 전파의 사명 감당하기에 먼저 우리 안에 행복이 넘쳐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 행복을 자연스럽게 세상에 전하게 되는 거죠. 예수 믿는 자녀로서, 뉴질랜드 광림의 권속으로서, 먼저는 우리 안에 행복이 넘쳐나는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복음이 무엇인가요? 원론적인 의미로는 “예수 십자가 부활입니다.” 좀 더 확대해서 말씀드리면, 말 그대로 복된 소식입니다. 그리고 복된 소식은 나에게 가장 유익이 되는 말입니다. 아파서 병원에 있는 사람에게는 “당신 다 나았습니다. 완치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복된 소식은 없습니다. 열심히 입시를 위해, 취업을 위해 노력한 이들에게는 “합격” 이보다 복된 소식이 없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무조건 “예수 천당 불신 지옥”만 외치는 게 아닙니다. “교회 오세요. 예수 믿으세요.” 전도하는 것만이 복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상처 가운데 있는 이에게 위로를, 절망 가운데 있는 이에게 소망을 전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도 보십시오. 기쁨으로 좋은 소식, 복된 소식을 전하는데, 그 소식의 중심 내용이 무엇인가요? 지금 이스라엘이 포로생활 가운데 있는데, 자유함을 얻을 것이라는 소식입니다. 지금 이방 민족에게 압제를 당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통치하심을 전하는 소식입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가 선포되는 것보다 더 큰 복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게 복음입니다. 예수 믿는 자로서 행복이 넘쳐나면 예수님을 전하는 거예요. 구원의 기쁨이 넘쳐나면 전하는 거예요.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겁니다. 교회로 인도하는 겁니다. 가장 귀한 복음 전도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 믿다가 낙심한 이들, 실족한 이들, 상처 받은 이들에게 다시금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전하는 겁니다. 어찌보면 이게 더 힘들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한국에서 뉴질랜드로 이사오신 분들, 아이들 데리고 가디언으로 오신 분들, 뉴질랜드 다른 지역에서 이사오신 분들, 그 분들에게 우리 교회를 소개하고 인도해주는 겁니다. 좋은 교회를 전하는 것도 정말 중요한 일이거든요.

  뭘로 전할까요? 입으로 할까요? 지식으로 할까요? 복음은 내 발로 전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말 하죠. 좋은 물건 하나 사려고 해도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7절에 말씀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복음을 전하는 발이 아름답다고 말씀합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금년에는 복음 전파의 사명 감당함으로, 이런 아름다운 발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세상 속에 평화를 선포해야 합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올바름과 친절함 사이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친절함을 선택하라.” 이유인즉은 올바름이라는 것은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올바르다, 정의롭다는 것은 시대나 문화나 환경에 따라 다 다르다는 겁니다. 세상 속에 평화를 선포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묵상하는 중에 이 글이 딱 떠올랐습니다. 사실 뭐 천성적으로 바른 것, 정의로운 것을 추구하는 게 익숙한 분들이 계십니다. 뭔가 틀리면 바로 잡아야 하는, “아닌 건 아닌거야.”라고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감동이나 변화가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화평이 이루어지게 어렵다는 거예요. 복음 전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항상 지적하고, 자신의 판단 기준에 따라서 옳고 그름을 나누어가면서 정의를 추구하다가, 그 모습 그대로 복음을 전한다고 할 때에 과연 사람들이 얼마나 잘 받아들일 것인가? 반대로 조금 어리숙해 보여도, 조금 손해 보는 것 같아도, 늘 친절하고, 상냥하고,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보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용납하고 이해하고 수용하는 모습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다고 할 때에, 그 복음이 어떤 능력을 일으킬 것인가? 

  오늘 본문에도 보면 중심구절인 7절에 말씀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두 가지가 짝을 이루고 있죠. 좋은 소식과 평화가 짝을 이룹니다. 복된 좋은 소식과 구원이 짝을 이룹니다. 그런데 결국에는 좋은 소식, 복된 좋은 소식, 평화를 공포함, 구원을 공포하는 것, 이 모두가 다 한 방향입니다. 7절 중반에 말씀하죠.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것은 이사야의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는 포로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나아가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는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구원이 임하는 거죠. 그러면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한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감탄의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발이 이러한 발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 가지고 나아가면 우리 삶에, 우리 주변에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평화의 도구로 내가 쓰임 받게 됩니다. 꼭 그렇게 쓰임 받아야 합니다. 내 걸음이 닿은 가정에, 속회에, 선교회에, 일터에, 학업에, 모든 걸음에 주의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는, 주의 평화를 실현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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