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 그는 내게,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2장 15-17절)
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16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17 내 사랑하는 자야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을지라
백합화가 아름답게 피어있는 푸른 풀밭에서 양떼를 먹이는 모습이 우리의 포도원, 우리 가운데 임하여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나라다. 불만 대신 감사의 마음, 분노 대신 사랑의 마음, 슬픔 대신 기쁨과 평강과 안식으로 충만한 나라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과 함께 믿는 자들 가운데 이미 임하여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평강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왜 그럴까?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해야 할 마음과 생각이 세상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 여우들 때문이다. 개역성경에는 작은 여우로 번역하고 있지만, 원래는 복수명사다.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지 못하도록 우리의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 여우가 그 만큼 많다는 뜻이다.
정신병자(psychosis)와 신경증환자(neurosis)의 구분은 자기인식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판단기준이 된다. 정신병자는 자기인식, 자기정체성이 없다. 자기가 비정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인식의 결여가 믿음의 세계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겔 13:10) 거짓 선지자들은 거짓된 평강을 선언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한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 중 심각한 것이 행복지상주의다. 성경은 행복하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도구로 전락하고 있고, 하나님은 나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 자기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마음이 편안한 것을 평강이라고 하지 않는다. 참 평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평강이다,,, 거짓된 평안을 선언하는 자들을 겔 13:4에서는 황무지의 여우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아, 너의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 같으니라” 그들은 우리의 포도원, 즉 하나님의 나라를 허무는 여우들일 뿐이다.
작은 여우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의 마음이고, 천국에 대한 소망이 살아있지 못한 마음이며, 세상근심으로 가득한 마음이며, 세상욕심에 사로잡혀있는 마음이다. 이런 여우들이 마음과 생각을 어지럽히고 있는 한, 하나님 나라의 평강을 제대로 누릴 수가 없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여우들과 동거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포기하고 사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하나님의 평강이 아닌, 거짓 평강 가운데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 15장 4-7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성도와 주님의 관계는 마치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와 같다. 성도와 주님과의 연합이 이런 관계란 뜻이다. 포도나무 가지는 나무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으면서 포도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 마찬 가지로 성도는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있는 가지와 같은 존재들이다. 역으로 말하면,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런데 4절 말씀이 어렵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우리가 주님 안에서 살면, 주님께서도 우리 안에서 사시겠다고 하셨다. 또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포도나무에서 가지가 나오지, 가지에서 나무가 나오지 않는다. 가지가 나무를 붙들고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가지를 붙들고 있는 것이다. 포도나무에서 가지에 생명을 공급하고 열매를 맺게 하듯이, 포도나무이신 주님께서 성도들을 붙잡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을까?
이 비유의 핵심은 성도란 자기 스스로는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는 철저하게 무기력한 존재라는 데 있다. 상도란 오직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 왜 성도의 본분을 망각하고 나를 떠나서 네 멋대로 살려고 하느냐? 너는 내게서 생명을 공급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임을 모르느냐? 너의 본분, 너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고 항상 내 안에 거하도록 하라. 그러면 열매는 저절로 열릴 것이다. 내가 너희 안에 열매가 맺히도록 할 것이다.” 이런 뜻이다.
포도나무가 가지를 내고, 생명을 공급하며 열매를 맺게 하듯이, 성도들이란 포도나무이신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 받아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 열매란 예수의 열매요, 성령의 열매요, 말씀의 열매요, 하나님의 평강이라는 열매이며, 하나님의 나라라는 열매이다.
그런데 7절에 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시기 때문이다. 그럴 때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게 된다고 하셨다. 물론, 아무 것이나 구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이 아니다. 주의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이다. 그들이 구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자신의 욕심을 구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주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는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속해있는 가지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자신의 욕심을 구하지 않는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으며, 주의 평강을 누리는 자들이다. 주님을 떠나서는 생명도, 진정한 평강도 없는 자들이다. 이것이 그가 내게 속해있고, 나는 그에게 속해있는 성도의 정체성이다.
채원병 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