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07); 왜 예배인가요?

기독교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07); 왜 예배인가요? <창세기 19:23~29>

오늘 본문의 배경은 성경 속 대표적인 죄악의 도시로 불려지는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롯은 삼촌 아브라함과 함께 갈대아 우르라는 고향 땅을 떠나서, 가나안에 정착합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길을 나섰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처음부터 안정된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이동을 많이 했는데, 왜 자꾸 옮겨다닐까요? 쉬운 말로 쫓겨다니는 겁니다. 저 애굽까지 내려가게 되는데, 거기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빼앗길 뻔한 위기도 겪게 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애굽에서 나올 때에는 거부가 되어서 나오게 됩니다. 

  

이어서 창세기 13장에 가면, 아브라함과 롯이 풍요함을 누리게 되고, 분가를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그대로 머물고, 롯은 눈에 보기에 좋아보이는 소돔 땅으로 향하게 됩니다. 늘 똑같은 패턴입니다. “보기에 좋아보이는 것을 따라가면 항상 죄의 길을 향하게 되죠.” 그래서 창세기 13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이어서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의 죄악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소돔 땅의 대표적인 죄악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적인 타락이었고, 또 하나는 세상적인 향락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멀리하는, 아니 아예 하나님을 모르는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죄악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려 멸망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소돔과 고모라가 오늘 성경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고대사회에서도 그런 모습이 만연했었고, 지금 한국 사회가, 세계 모든 나라에도 비슷한 모습이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우리 믿는 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요? 답은 하나입니다. 십자가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둠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필요한 것은 빛입니다. 죄악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필요한 것은 십자가 보혈의 공로,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거룩함의 절기, 이 사순절에, 주의 십자가 붙잡고 거룩함의 길로 나아가는 결단이 있어지는 시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죄악된 것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의 죄악으로 인해서, 그 땅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롯을 향해 은혜를 베푸시는데 두 천사를 통해 롯에게 심판에서 피할 길을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창세기 19장 전체를 보면 롯은 지체합니다. 천사는 서두르는데, 롯은 계속 지체합니다. 사실 천사는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정작 서둘러야 할 롯은 지체합니다. 왜 지체합니까? 아쉬운거예요. 자신이 지금껏 이룬 가업, 물질, 소돔에서의 삶, 그 모든 것에 미련이 남는 겁니다.  그러자 천사들은 롯의 손과 아내와 두 딸의 손을 다 잡고는, 강제로 끌고 나옵니다. 한 마디로 미련두지 말고, 살 길을 찾으라는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롯은 지체합니다. “저 산까지는 못 갈 것 같습니다. 대신 저 앞에 작은 성읍이 하나 있는데, 저기까지만 가면 되지 않을까요?” 결국 롯은 소알이라는 성읍으로 도망갑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본문이죠. 소돔과 고모라 땅에는 유황과 불이 비가 내림같이 쏟아져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30절에 보면, 롯은 다시금 소알 땅을 떠나서 천사가 처음에 명령한대로 산으로 올라갑니다. 왜 롯은 이제야 산으로 올라가는 걸까요? 여전히 미련이 남았던 거죠. 소돔과 가까운 성읍 소알에 머물면서, 지켜보는 겁니다. 끝까지 미련을 떨치지 못한 거죠. 미련을 떨치지 못한 사람은 또 있습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도망하라는 천사의 말을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아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입니다. 도망하면서도 생각이 나는 겁니다. 저 소돔 땅에서의 편안했던 삶, 내 집, 내가 이룬 모든 것들, 은금패물들. 발길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 자리에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립니다. 

  

죄악된 것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내 발목을 잡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뒤를 돌아볼 때가 있습니다. 늘 그런 부러움이 있잖아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달려 마지막 순간에 구원 받은 강도.” “야! 저게 최고다. 세상 즐거움 다 누리고, 하고 싶은대로 다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 영접하고 구원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혹 지금도 그런 부러움이 있는 분들이 있다면, 그게 죄악된 것에 미련을 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다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믿음 생활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적인 즐거움에 미련을 가지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나 보기에 좋아보이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길 때도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이루고 다음에 신앙생활 잘 하겠다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회는 언제까지나 있는 게 아닙니다. 죄악된 것은 빨리 털어버리셔야 합니다.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일단 내가 십자가를 붙잡았다면,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것 뿐입니다. 다 벗어버리고, 결단하여 주님만 따라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받은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롯을 위해서, 소돔의 멸망을 유보하고자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 의인 50명만 있으면, 45명만 있으면” 그러면서 총 여섯 번을 하나님과 네고를 해서는 “의인 10명만 있으면” 커트라인을 엄청 낮췄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브라함이 아예 좀 더 기도해서, 롯의 가족 숫자만큼 줄였으면 소돔땅이 그렇게 망하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 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할만큼 했다. 그래도 열 명은 있을 줄 알았겠지.” 하지만 이건 다 의미 없는 말이죠.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과연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은 의인 열 명 중에 한 명으로 계수가 되기는 하였을까?” 저들의 모습을 보면, 아무리봐도, 롯이나 그 아내나 두 딸이 의인이라 인정 받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보십시오. 롯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끝까지 주저합니다. 소돔에서 피난하는 롯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주신 말씀을 확실히 믿었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계속 주저하는 것이 심판과 종말의 메시지를 믿음으로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롯의 아내도 보십시오. 그녀는 소돔과 고모라의 향락에 더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소돔의 삶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아 소금 기둥이 되고 맙니다. 이 모습 하나에 롯의 아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살았을지 짐작하게 합니다. 그럼 두 딸은 어떤가요? 본문에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롯과 두 딸은 산으로 올라가서 지내게 됩니다. 두 딸은 앞날을 생각해보는 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그러면서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두 딸이 차례대로 아버지와 동침하여 모압과 벤암미를 낳습니다. 이 두 딸의 행태가 어떠한가요? 소돔과 고모라의 방식대로입니다.

  

자, 그럼 롯과 그 아내와 두 딸, 과연 “의인 열 명”에 포함될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고 보십니까? 롯과 두 딸은 의인이었기에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롯을 구하신 이유는 29절에 명확하게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아브라함의 기도가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롯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따라서 롯이 생명을 부지한 것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롯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지금이라도 받은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야죠. 하지만 롯은 무엇을 하고 있나요? 동굴에 거주하면서 두 딸을 통해서 후손을 이어갑니다. 롯은 지금 좌절감 속에서, 자신이 망해버린 그 현실 속에서, 자신의 삶의 터전이 다 무너져버린 현실 속에서, 쉬운 말로 “될대로 되라.” 이렇게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이후에 롯은 성경의 역사 속에서 사라진 인물이 되고 맙니다.  롯이, 두 딸이, 생명을 구원 받은 뒤에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았다면, 그에 감사했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여 살아갈까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다른 역사가 이어지지 않았을까요?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움을 받았습니다. 그 은혜를 받은 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받은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더 주님을 바라보고, 더 주의 말씀을 붙잡고, 더 순종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은혜 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삶 속에 더 큰 은혜가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2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하나님께서 누구를 생각하셨다고요?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앞서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천사들을 영접하고 대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서도 보면 아브라함이 극진히 천사들을 대접하고, 천사들이 떠나가는데 그 때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소돔을 향한 심판의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의인 10명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이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게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아주 특별하게 생각하셨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감추지를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사람이 된 것이죠. 

 창세기 30장에 보면 야곱의 아내인 라헬이 자녀가 없어서 낙심합니다. 그러다가 후에는 요셉을 낳게 되죠. 그 때의 장면을 성경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사사기 16장에도 보면 삼손이 마지막 순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서도 삼손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또한 열왕기에 보면 이스라엘이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를 지나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죄악된 모습을 갖게 되죠. 당장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나라의 명맥이 유지된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생각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내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성경에 보면 생각과 비슷한 단어가 나옵니다. 바로 “기억”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역사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고 붙잡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삶을 이끄시고, 인도하시고, 축복하신 것에 대한 감사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할 때에, 아브라함의 삶을, 아브라함의 기도를, 아브라함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생각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 성도님들 서로간에도 생각나는 지체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 거함으로, 주님 예비하신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결론이 가장 중요합니다. 자,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이었나요? “왜 예배인가요?”입니다. 오늘 설교 내내 예배에 관한 말씀은 하나도 없었는데, “왜 예배인가요?”일까요?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아브라함과 롯입니다. 롯은 죄악된 것에 미련을 두는 모습으로 결국 죄악의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또한 롯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와 함께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합당한 모습을 보이지도 못합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어떤가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심판을 대비할 기회를 주십니다. 롯이 심판 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과 그 가족을 구원의 길로 이끄십니다.  아브라함과 롯, 갈대아 우르에서의 출발과 하란을 거쳐, 가나안 정착까지는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저들의 삶의 결과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납니다. 왜 저들의 삶이 이렇게 극명하게 다른 길로 가는 것일까요? 딱 하나입니다. “예배하는 삶”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예배합니다. 창세기 12장에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부터, 이동하고 정착하고 이동하고 정착하는 삶을 반복하는데, 새롭게 정착할 때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마음은 힘들고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해도 늘 예배합니다. 아브라함은 롯과 헤어지고 나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하지만 롯이 예배드렸다는 말은 성경에 단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좋은 땅을 먼저 선택했을 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분가하여 자신의 기업을 세웠을 때, 예배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중에도 생명을 건져, 소알 성에 머물 때에 예배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소알성을 나와 산에 올랐을 때, 두 딸과 함께 예배드려야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단 한번도 롯이 예배드렸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왜 예배인가요? 예배가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죄악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마치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영적인 타락, 성적인 타락, 물질과 향략으로 물든 세상 속에서, 믿음의 백성이 예배를 놓치면 죽는 겁니다. 의인 열명이 없는 시대 속에서, 내가 그 열 명의 반열에 들어가고자 하려면 예배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다시 한 번 예배를 향한 사모함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의 감격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죄악된 것에 미련을 두지 말고, 십자가 죄 사함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하시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날마다 주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배하는 삶,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삶,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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