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이민 열전(4-2) 남국정사 주지 동진 스님
일요시사는 ‘뉴질랜드 이민 열전’을 싣는다. 뉴질랜드 이민 역사에서 한 길을 걸어온 사람 가운데 뒷세대에게 기록을 남겨도 좋을 만한 사람을 선정했다. 그 공과(功過)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을 통해 뉴질랜드 이민사가 새로운 시각에서 읽히기를 바란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믿는다. <편집자>
“종교가 세상과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창건 20주년 기념 법륜 스님.혜민 스님 법회 가져…
남국다도회.골프대회 통해 교민 사회와 소통
“종교 건물은 무엇보다 격(格)이 있어야 합니다. 건물을 보고 경건함과 성스러움을 느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남국정사는 그런 점에서 아직 제 꼴을 갖췄다고 하긴 힘듭니다. 빠르면 올해 말, 늦어도 다음 해 초에는 대웅전 건축에 들어갑니다. 남국정사의 스무 해 숙원 사업의 첫 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문화관과 승방도 함께 건축할 계획입니다. 많은 불자의 도움과 교민 사회의 관심을 부탁합니다.”
진흙 속에서도 청정을 머금은 연꽃
아침 열 시, 나는 오클랜드 서쪽 쿠미우(Kumeu)에 있는 남국정사에 도착했다. 더할 나위 없이 맑은 초가을 하늘 아래 연꽃이 군무를 펼치듯 피어 있었다. 왕관 모양을 한 하얀 연꽃이 하늘을 향했다. 나는 연못 주위를 몇 바퀴 돌았다. 진흙 속에서도 맑고 깨끗함(청정 淸淨)을 머금은 꽃, 연꽃을 보며 나는 내 마음속에 더러움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어느 가수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아니 나는 꽃보다 훨씬 못한 존재일 때가 많았음을 잘 알고 있다.
동진 스님은 누구보다 연꽃을 사랑한다. 2004년 11월 남국정사 주지로 부임한 동진 스님은 몇 해 뒤 연못을 만들어 연꽃(Lotus)을 심었다. 아마 오클랜드에서는 유일하게 남국정사에서만 볼 수 있는 꽃일지도 모른다. 남국정사는 연꽃이 필 때마다 불자들은 물론 교민들에게 문을 열어 아름다움을 즐길 기회를 주고 있다.
남국정사, 1994년 초 가정 법회로 시작
이번 글은 남국정사의 스무 해 역사를 다룬다. 남국정사는 1994년 초, 오클랜드에 사는 50여 명의 불자가 뜻을 함께하면서 시작됐다. ‘재 뉴질랜드한국불교인회’를 발기, 발기위원장에 임정연 거사를 선출했다. 뉴질랜드에 점수제 이민이 도입돼 하루가 다르게 한인 이민자가 늘어날 때였다. 불교는 가톨릭이나 개신교보다 여러모로 미미했다.
몇 달 준비한 끝에 ‘한국불교인회’가 창립됐다. 초대 회장에 박홍주 씨를 선임했다. 같은 해 부처님 오신 날(5월 15일)에 첫 법회를 열었다. 오클랜드 그린레인(Green Lane)에 있던 한 가정집이었다. 법문을 전하실 스님도, 모양새를 갖춘 법당도 없었다. 가정 법회였다. 신도들이 목탁을 치고 염불을 외웠다. 속된 말로 ‘집도 절도 없이’ 시작됐다. 하지만 뉴질랜드 땅에 부처님의 정신을 알리겠다는 열정만은 뜨거웠다. 그렇게 조금은 부족했지만, 아주 의미 있게 부처님의 세계가 한인 사회에 퍼져 나갔다.
가정집을 돌며 법회를 열다 보니 생각지 못한 문제가 터졌다. 주위에서 민원이 들어온 것이다. 초창기부터 함께해 온 한 불자의 얘기.
“그때 수십 가정이 한 집에 모여 법회를 가졌습니다. 좁은 동네 골목에 많은 차가 주차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웃에 불편을 끼치게 됐지요. 한 해 넘게 이어지던 가정 법회는 결국 문을 닫았고 대신 커뮤니티 홀 같은 곳을 이용해 드렸어요. 전화위복이 된 셈이지요. 지금도 당시만 생각하면 가슴이 벅찹니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불심이 뜨거웠던 때라고 믿습니다.”
1996년 달라이 라마 법회 때 큰 힘 보태
한국불교인회는 그 뒤 서니눅 커뮤니티 센터(Sunnynook Community Centre), 말보로 파크 홀(Malborough Park Hall) 같은 곳에서 법회를 가졌다. 초창기 활동 가운데 눈에 띄는 것 가운데 하나는 달라이 라마 법회에 자리를 함께한 것이다. 1996년 9월 14일 오클랜드 엘리슬리(Ellerslie) 경마장에서 열린 법회에 총 7천여 명이 참석했다. 한국불교인회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국에서 특별히 불러온 한국불교방송 합창단이 행사를 더 빛내줬다.
다음 해인 1997년 9월, 한국불교인회는 쿠미우에 새 둥지(18에이커, 약 2만 평)를 텄다. 오클랜드 시내에서 승용차로 30분 거리,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리였다. 한국의 산사(山寺)만큼 고요하지는 않았지만 속세의 번뇌를 벗고 자아(自我)를 찾기에는 딱 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떠돌아 다녀야 했던 셋방살이의 서러움을 더는 겪지 않아도 됐다. 지윤 비구니 스님이 주축이 되어 한 푼 두 푼 모은 불자들의 성금에다 부산 안국선원 원장 수불(修弗) 스님의 보시를 더해 지금의 남국정사 터를 마련했다. 이때부터 남국정사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남국정사 터는 원래 수선화를 재배하는 농장이었다. ‘봄의 전령’이라는 수선화, 그 향기는 부처님의 말씀과 함께 잔잔하게 퍼져 나갔다.
초창기부터 함께해 온 한 불자의 이어지는 얘기.
“저희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허름한 창고 같은 농장이었어요. 종교적인 냄새는 전혀 맡을 수 없었지요. 농기계가 가득 찬 창고를 고쳐 법당 자리를 만들어 법회를 드리기 시작했어요. 가정집으로 사용하던 곳은 손을 조금 대 스님이 머무시도록 했지요. 한국 절에 비하면 초라하기 한이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 절을 가졌다는 점에서 모두 자부심을 느꼈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오르네요.”
2004년 동진 스님 주지로 부임
제집을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남국정사의 초창기는 순탄치 못했다. 불자들을 돌봐줄 주지가 오랫동안 한 자리를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94년 창립 때부터 1997년 남국정사를 마련할 때까지 법회는 신심이 깊은 불자들과 한국에서 여행 오신 스님들이 돌아가며 이끌었다. 그러다가 남국정사가 생기면서 조금 안정되는 듯했으나 한 스님이 계속해 절을 돌볼 수 없는 상황 탓에 큰 발전은 없었다.
그런 상황은 현재 주지인 동진 스님이 2004년 취임하기까지 계속됐다. 그사이 지윤 스님, 무진 스님, 성춘 스님, 도암 스님이 주지로 법회를 이끌었다. 남국정사의 초창기 10년은 그렇게 차근차근 ‘기반’을 닦아 나갔다. 더디긴 했지만 오늘의 남국정사를 만든 아름다운 나날이기도 했다.
새천년이 시작된지 네 해 뒤, 동진 스님이 주지로 취임했다. 동진 스님은 남국정사를 세울 때 힘을 보태준 수불 스님의 권고를 받아 뉴질랜드에 왔다. 한 달 여행 끝에 뉴질랜드가 맘에 들었고, 남국정사의 사정에 공감해 부처님 세계를 전하기로 마음 먹었다.
동진 스님의 첫 마음은 어땠을까?
“첫 법회 때 여든 명 정도가 참석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불자들 모두 신심이 뜨거웠습니다. 그런데도 그들 마음속 한 구석에는 저를 믿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스님도 여기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떠나시지 않을까’하는 불안감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심 다짐했습니다. 적어도 10년은 이곳을 지키리라,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주지로 있는 동안 내 나름대로 한다고 하기는 했는데 신도들이 어떻게 평가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스님의 다짐처럼 동진 스님은 남국정사를 10년(정확히는 11년 6개월) 동안 지켰다. 그리고 지금 아름답게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다. 대의를 위해 물러나야 할 때를 분명히 아는 스님이다.(이 얘기는 다음 호에 이어진다.)
한민족학교, 민주평통 같은 곳에 힘 보태
동진 스님이 취임하고부터 교민 사회에서 남국정사의 입지는 분명해졌다. ‘세상 속의 종교(불교)’를 강조한 덕분이었다. 동진 스님은 ‘남국정사’라는 이름 아래 교민 사회 곳곳에 참여했다. 한민족학교, 코리안가든, 민주평통뉴질랜드협의회 같은 곳에 힘을 보탰다. 동진 스님은 종교가 세상과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다.
아울러 백련차문화원장 호칭에 걸맞은 유명한 차인(茶人)인 동진 스님은 남국정사 안에 ‘남국다도회’를 만들어 차의 정신을 교민들에게 소개하는 동시에 2006년부터 시작한 남국정사배 신년 한인 골프대회를 열어 문화와 스포츠를 통한 교민 화합에 앞장서 왔다. 한인의날, 한글학교, 헤리티지(Heritage) 축제, 해밀턴 문화의날, 교민 사회 각종 행사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차 시연과 시음을 통해 한국의 멋과 향을 전하기도 했다.
동진 스님이 열한 해 넘게 주지로 있으면서 한 활동 가운데 교민 역사에 뚜렷이 남은 흔적이 있다. 바로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는 법륜 스님과 혜민 스님을 초청, 교민 상대로 법회를 가진 일이다. 남국정사 창건 20주년 기념 목적으로 2014년 말과 2015년 초 가진 이 두 행사로 남국정사는 교민들에게 더 가까이 가는 기회를 만들었다.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과 혜민 스님의 마음 치유 콘서트에는 2,000명이 넘는 교민이 참여하는 대성황을 이뤘다.
동진 스님은 또한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남국정사 대웅전 건립을 곧 시작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종교 건물은 무엇보다 격(格)이 있어야 합니다. 건물을 보고 경건함과 성스러움을 느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남국정사는 그런 점에서 아직 제 꼴을 갖췄다고 하긴 힘듭니다. 빠르면 올해 말, 늦어도 다음 해 초에는 대웅전 건축에 들어갑니다. 남국정사의 스무 해 숙원 사업의 첫 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문화관과 승방도 함께 건축할 계획입니다. 많은 불자의 도움과 교민 사회의 관심을 부탁합니다.”
‘따뜻한 밥 한 끼’ 식구로 만들어 줘
동진 스님과 나는 두 시간을 넘게 쉬지 않고 얘기를 나눴다. 스님은 한두 달 뒤면(취재 당시) 남국정사를 떠난다. 그래서 그런지 지날 날을 얘기할 때는 조금은 아쉬움을 토해냈고, 앞날을 얘기할 때는 장밋빛 희망을 밝혔다.
“박 선생, 시장하시지요? 점심이나 드시고 가세요.”
스님은 밭에서 치커리와 상추를 뽑아왔다. 능숙한 솜씨로 된장찌개와 김치전을 만들었다. 삼십 분도 채 안 돼 식탁은 풍성한 음식으로 채워졌다. 스님이 젖은 손을 옷에 닦으며 말했다.
“자 이제 드십시다. 절밥도 괜찮을 겁니다.”
물론 스님이 만든 절밥은 훌륭했다. 나는 난생처음 스님이 직접 요리한 절밥을 얻어먹었다. 동진 스님의 주지 취임 뒤 남국정사가 큰 문제없이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유를 알았다. ‘따듯한 밥 한 끼’ 덕분일 거라고 믿었다. 우린 ‘편하게 밥 먹을 수 있는 사이, 식구(食口)’가 되었다. ''
<다음 호에 계속>
글_프리랜서 박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