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빈 [朴重彬, 1891~1943]

불교/원불교


 

박중빈 [朴重彬, 1891~1943]

일요시사 0 3467

주요약력

 

원불교의 교조. 아명은 처화(處化)ㆍ진섭(鎭燮). 족보명은 희섭(喜燮). 중빈은 법명. 법호는 소태산(少太山). 원불교 교단의 존호는 대종사(大宗師)ㆍ원각성존(圓覺聖尊)으로 받든다. 1891년 5월 5일(음 3.27),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영촌마을의 평범한 농가에서 부친 회경(晦傾)과 모친 유정천(劉定天)의 4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진리에 뜻을 두고 오랜 구도 고행 끝에 1916년 4월 28일 일원상진리(一圓相眞理)를 대각하고 원불교를 창립했다. 원불교에서는 이날을 대각개교절(大覺開敎節)로 정하고 경축하며, 이 해를 원기(圓紀) 원년으로 헤아린다. 소태산은 최초법어를 설하고 시국을 살펴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대종경》 서품4)는 표어를 지도강령으로 삼았다. 

구인제자를 얻고 저축조합과 방언공사를 시행하며 법인기도(法認祈禱)를 행한 다음, 1919년(원기4) 주석처를 전북 부안으로 옮겨 교리강령(敎理綱領)을 제정하고 교서를 초안하며 회상창립을 위한 인연규합에 힘썼다. 1924년(원기9) 6월 1일 전북 익산의 보광사(普光寺)에서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같은 해에 익산시 신룡동 344-2번지에 중앙총부를 건설하여 전무출신 공동생활을 시작한다. 이어 소태산은 28년간 각종 제도확립ㆍ인재육성ㆍ교서편정ㆍ교화훈련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1943년(원기28) 5월 16일 생사법문(生死法門)을 설하고, 6월 1일 열반했다.

 

생애

 

소태산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총명하고 기상이 늠름하며 도량이 활달하고 매사에 주의심이 깊었다. 3세인 1893년 어머니 등에 업혀 ‘노루목에 달 따러 가자’고 졸라대고, 4세인 1894년 5월 동학군이 영광에 진입했을 때, 부친의 꾸지람을 들은 그는 ‘동학군 온다’고 둘러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7세되던 1897년 소태산은 ‘하늘은 왜 푸를까’ 하는 자연현상에 대해 의문을 가졌으며, 9세되던 1899년 ‘어머니와 아버지는 왜 다정할까’ 하는 인간사에까지 의문을 품었다. 10세인 1900년 구호동의 서당에 다니기 시작했으나 우주자연과 인생의 문제를 물어 훈장을 당황케 하고 그해 동짓날에는 나무 낟가리에 불을 질러 훈장을 놀라게 한 다음, 서당을 그만 두었다. 

11세인 1901년 10월 군서면 마읍리 선산의 시제에 갔다가 산신이야기를 듣고, 산신을 만나 의문을 해결하겠다는 생각으로 구수산 삼밭재 마당바위에 기도하러 다니기 시작하여 이후 4년간 계속했다. 15세인 1905년 구호동으로 집을 지어 이사 간 다음, 4월 19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홍곡리 장기촌의 양하운(梁夏雲)과 결혼했다. 그해에 김화천에게 《통감》을 배웠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었다. 16세인 1906년 정월 처가에서 고대소설 《박태보전》ㆍ《조웅전》에서 도사(道士)를 만나 신이(神異)한 체험을 하는 내용을 듣고, 산신기도를 중지하고 이인 도사를 만나 의문을 해결하기로 결심하고 노상에서 행색이 이상한 사람이나 걸인을 도사로 알고 초빙하여 시험해 보는 등 6년간을 스승 찾기에 주력했다. 

이처럼 소태산은 살림이나 글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날이 갈수록 구도의 뜻이 더욱 간절해졌다. 부친은 그의 뜻을 알고 뒷바라지하며 19세되던 1909년에는 삼밭재에 초당을 지어 기도하도록 했는데, 20세인 1910년 10월 29일에 부친상을 당하자, 그는 큰 충격에 빠졌고 가세는 크게 기울어졌다. 22세 된 1912년에는 도사 만날 생각을 단념하고, 의문이 깊어진 가운데 ‘장차 이 일을 어찌할꼬?’ 하는 탄식과 더불어 한 생각으로 멎은 채 자주 돈망(頓忘)의 상태에 들었고, 온몸에 부스럼 등의 병이 생겨 이웃 사람들은 그를 폐인으로 여기게 되었다. 23세되던 1913년 노루목 외딴 집으로 이사했다. 

24세되던 1914년 3월 의형인 김광선의 주선으로 전북 고창군 심원면 연화봉을 찾아 수양하고 6월에 귀가했는데, 하루에도 밤과 낮, 한 달에도 선후 보름으로 영문(靈門)ㆍ혜문(慧門)이 밝고 어두워지는 변동을 경험했다. 이후에도 강변의 입정상(入定相)을 보이는 등 점차 모든 계교를 잊는 선정(禪定)의 경지가 계속되었다. 마침내 26세되던 1916년 4월 28일 이른 아침, 동녘에 번지는 서광을 보면서 홀연히 정신이 쇄락하고 마음이 밝아지며 온몸이 상쾌하고 기운이 솟아나며, 영문이 열리고 오랫동안 쌓였던 모든 의문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계기를 맞이한다. 

그간에 쌓였던 우주와 인간의 이치를 연마하자 모두가 한 생각을 넘지 않아 환하게 밝아졌고, 스스로 심독희자부(心獨喜自負)하게 되었다. 이른바 궁극적인 종교체험인 대각을 이룬 것이며, 이에 의해서 밝혀진 바를 일원상진리, 이날을 대각개교절이라 부르며 원불교의 창립일로 하고, 이해를 원기 원년으로 삼는다. 소태산은 대각의 심경을 “만유(萬有)가 한 체성(體性)이며 만법(萬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대종경》 서품1)라 밝히고, 시대상황을 보고 도탄에 빠진 시대인심을 바로잡기 위해 개교표어를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 내걸고, ‘최초법어(最初法語)’를 설했다. 

소태산이 대각을 이루고 건강을 회복하며 구세경륜의 포부를 갖는 등 변화하는 모습이 주변에 알려졌고, 그를 대하는 사람들은 괄목상대하게 되었다. 그는 과거 성현들의 깨친 바를 참조하기 위해 각 종교의 경전을 구해 열람하게 되는데, 유교의 사서(四書)와 《소학(小學)》, 불교의 《금강경(金剛經)》ㆍ《선요(禪要)》ㆍ《불교대전(佛敎大全)》ㆍ《팔상록(八相錄)》, 도교의 《음부경(陰符經)》ㆍ《옥추경(玉樞經)》, 동학의 《동경대전(東經大全)》ㆍ《가사(歌詞)》, 그리스도교의 《구약(舊約)》ㆍ《신약(新約)》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금강경》은 꿈을 통해 그 이름을 알고 모악산 불갑사에서 구해 보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석가모니불을 성인들 중의 성인이라 찬탄하고, 연원(淵源)으로 정한 다음 불법(佛法)을 주체삼은 회상(會上)건설을 선언했다. 그해 7월경,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8인의 표준제자를 얻어 단(최초의 수위단)을 구성함으로써 교단의 최초 모습을 갖추고, 27세되던 1917년(원기2) 8월, 표준제자들을 중심으로 저축조합을 창설하여, 금주단연ㆍ허례폐지ㆍ공동출역 등으로 자본금을 모으고 근검저축ㆍ이소성대(以小成大)의 정신으로 공부와 사업할 토대를 마련한다. 

이 해에 제자를 찾아 전북 정읍 화해리의 김해운가를 방문하여 스승을 찾아 헤매던 정산종사와 상봉하며, 학식이 도저하고 구도고행을 계속해 온 그를 제자로 맞아들였다. 소태산은 28세되던 1918년(원기3) 3월, 조수가 내왕하는 영광 갯벌을 막아 간석지를 만드는 방언공사에 착수하여 영육쌍전(靈肉雙全)ㆍ일심합력(一心合力)의 정신으로 추진했으며, 그해 10월에 1회를 12년으로 하고 3회 36년을 1대로 하는 창립한도를 정하여 중장기 발전계획에 의한 교단 창립을 분명히 했다. 같은 달 첫 모임터인 구간도실(九間道室) 건축을 착수하여 12월에 준공하고, ‘대명국영성소 좌우통달 만물건판양생소(大明局靈性巢左右通達萬物建判養生所)’란 간판을 내걸었다. 

이듬해인 29세되던 1919년 3월 방언공사를 완공하고, 사회적으로 3ㆍ1독립운동이 일어나는 상황 아래서 생민의 고통이 한이 없을 것을 내다보면서 세상을 구하고 천의(天意)를 감동시키기 위해 구인제자들과 특별기도를 행하기로 하고, 3월 26일부터 재계(齋戒)하고 삼육일(음력 6일, 16일, 26일)로 산상기도를 시작했다. 마침내 8월 21일 구인제자가 창생을 위해 희생할 것을 결심하고 ‘사무여한(死無餘恨)’이라 쓴 증서에 백지장(白指章)을 찍자 혈인(血印)의 이적(異蹟)이 나타났다. 소태산은 이를 법계인증(法界認證)으로 받아들이며, 세계공명(世界公名)으로 법호(法號)와 법명(法名)을 주어 창생제도를 강조했는데(《원불교교사》 제1편 제4장), 이에 나타난 무아봉공(無我奉公)ㆍ사무여한의 정신이 후일 전무출신의 기본정신이 된다. 

이해 10월 6일, 소태산은 ‘저축조합’의 이름을 ‘불법연구회기성조합’으로 고치고, 불법을 선언했다. 소태산은 8월 휴양처를 물색하던 중 전북 김제의 모악산 금산사에서 잠시 머물며 일원상()을 그려 벽에 걸고, 부안 봉래산으로 옮겨 12월에 실상사 옆에 몇 간 초당을 마련하여 주석했다. 30세 되던 1920년(원기5) 4월에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四恩四要)와 공부의 요도 삼강령팔조목(三綱領八條目:삼학팔조)의 교리강령을 발표했다. 이를 전후하여 《조선불교혁신론(朝鮮佛敎革新論)》과 《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要論)》 등을 초안하고, 백학명(白鶴鳴)을 비롯한 고승들과 교유하며 다양한 법문을 설했다. 

31세되던 1921년(원기6) 7월에 실상초당 뒷편에 석두암(石頭庵) 곧 봉래정사(蓬萊精舍)를 마련하고 창립인연을 결속하여 훈련시키며, 교단공개를 준비했다. 34세되던 1924년(원기9) 4월 29일, 익산의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창립총회를 개최하여 총재에 취임하고 교단을 공개하며, 8월 익산시 신룡동 344-2번지의 현 소재지에 6만여평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중앙총부를 건설, 출가교역자인 전무출신(專務出身)의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이해에 소태산은 제자들을 데리고 전북 진안 만덕산을 방문하여 수선회(修禪會)를 열었으며, 35세되던 1925년(원기10) 3월 정기훈련법(定期訓練法)과 상시훈련법(常時訓練法)을 제정하여 5월부터 하ㆍ동선(夏冬禪)제도를 실시함으로써 인재 육성에 착수하고, 8월에는 공부ㆍ사업고시법과 유공인 대우법을 제정했다. 

전답을 빌려 경작하고 엿장사를 하는 등 어려운 생활 속에서 주경야독(晝耕夜讀)의 공부분위기를 조성해 나가며, 36세되던 1926년(원기11) 2월에는 신정의례(新定儀禮)를 발표하여 생활의식에 변화를 도모하고, 7월에는 서울 창신동에 서울출장소를 마련하여 수도권 교화에 나섰다. 37세되던 1927년(원기12) 3월 교단 최초의 교재인 《수양연구요론》과 규약경전인 《불법연구회규약》을 발간하고, 38세되던 1928년(원기13) 3월 26일에는 창립 제1회의 기념총회를 개최하며, 행ㆍ재정의 각종 제도를 마련하는 가운데 농업부 기성연합단과 인재양성소 기성연합단을 창립했다. 

이해 5월에 월간 기관지 《월말통신》을 발행하는데 이에 법설 ‘약자로서 강자되는 법문’ 곧 최초법어 중의 ‘강자ㆍ약자의 진화상 요법’을 발표했으며, 9월 26일 가을 공동제사기념일에 ‘금강산과 그 주인’을 주제로 설법했다. 39세되던 1929년(원기14) 2월 소태산에 대한 공식호칭을 ‘종사주(宗師主)로 통일하며, 4월 은부모시자녀(恩父母侍子女)의 결의법을 제정하고, 40세되던 1930년(원기15) 5월에는 제자들을 데리고 금강산을 탐승하며 다양한 법문을 남겼다. 41세되던 1931년(원기16) 4월에 여자수위단 시보단(試補團)을 내정하고, 9월 부산을 거쳐 범어사 등 불교사찰과 경북 구미 용담의 최제우(水雲崔濟愚)묘를 참배했다. 

42세되던 1932년(원기17) 4월 최초의 교리서 《보경육대요령(寶經六大要領)》을 출간했으며, 43세되던 1933년(원기18) 7월, 전라북도 경찰국에서 교단의 기관지 《월보》가 무허가라고 하여 압수하자, 8월부터 《회보》로 바꾸어 속간했다. 1934년(원기19) 새로운 ‘회규(會規)’에 의해 교정원(敎政院)ㆍ서정원(庶政院)의 양원 10부제를 시행했으며, 소태산은 종법사(宗法師)에 추대되었다. 이해 5월부터 음력 법회를 양력으로 전환하며, 8월 익산에 합자회사 보화당 약방을 설립했다. 45세되던 1935년(원기20) 4월에는 일본 오사카에 지부를 설립하고, 중앙총부 대각전(大覺殿)을 준공하여 일원상을 봉안했으며, 《조선불교혁신론》을 발간했다. 

8월에는 《예전》을 발간했으며, 9월에는 총부 경내에 야학원 ‘수도학원(修道學院)’을 설치했고, 10월에는 중앙총부를 방문한 안창호(島山安昌浩)와 만나 애족애민(愛族愛民)에 공감했다. 46세되던 1936년(원기21) 9월에 일제(日帝) 당국에 의해 오사카지부가 폐쇄되었으며, 10월에 일제는 총부 경내에 주재소를 설치하여 상시 사찰을 했다. 48세되던 1938년(원기23) 8월에 중앙총부를 불시 검문한 총독부 경무국장 일행과 교리에 대해 담판하며, 11월에는 처음으로 ‘교무강습회’를 개최하고, ‘심불일원상내역급서원문(心佛一圓相內譯及誓願文)’을 발표했다. 

49세되던 1939년(원기24) 6월 소태산은 개성에 행가하고, 제자인 송벽조의 ‘일왕모독사건’을 일으킴에 따라 경찰에 연행되어 책임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50세되던 1940년(원기25) 제1대 2회를 맞이했으나 일제의 불허로 기념대회를 갖지 못했고, 같은해에 교역자 양성을 위한 전수학원으로 유일학원(唯一學院) 설립을 신청했으나 불허되며, 6월 일제에 의해 기관지 《회보》가 정간당했다. 9월 제자들에게 명하여 초기교서를 통일수정하는 《정전(正典)》 편찬작업에 착수하며, 성가인 ‘회가(會歌)’ 가사 내용의 혐의로 각처 교당이 심문당했고, 소태산은 창시개명에 응하여 ‘일원증사(一圓證師)’라고 했다. 

51세되던 1941년(원기26) 1월 25일 대중에게 전법게송(傳法偈頌)인 ‘일원상게송’을 공포(公布)했으며, 이 해에 종법사ㆍ수위단원의 임기를 6년으로 하는 ‘회규’를 정비하는 등 행정조직을 강화했다. 12월에 아시아ㆍ태평양전쟁이 일어난 급박한 시국 아래 52세되던 1942년(원기27) 5월에는 개인명의로 등기되어 있던 교산(敎産)들을 공증(公證)하며, 총부 경내에 탁아소 겸 보육원인 ‘자육원’ 설립하고 청원했다. 당시 소태산은 교단이 사회에 유익을 주면서 발전하는 방향으로 교화ㆍ교육ㆍ자선(사회복지)을 교단3대사업목표로 설정하고, 최후로 지방을 순회하며 교도들의 신성과 결속을 다지는 한편, 교서 《정전》을 친감(親鑑)하여 전라북도에 출판을 신청했지만, 당국은 ‘황도선양(皇道宣揚)의 정신이 결여되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불허했다. 

53세 되던 1943년(원기28) 2월에는 ‘교리도(敎理圖)’를 발표하고, 3월에는 전년도에 중앙총부를 방문하여 소태산의 가르침과 교단운영에 대해 감복한 《불교시보》 사장 김태흡의 주선에 의해 총독부의 허가를 얻어 《불교정전(佛敎正典)》으로 발행에 회부하며, “때가 급하여 이제 만전을 다하지는 못했으나, 나의 일생 포부와 경륜이 그 대요는 이 한 권에 거의 표현되어 있나니, 삼가 받아가져서 말로 배우고, 몸으로 실행하고, 마음으로 증득하여, 이 법이 후세 만대에 길이 전하게 하라”(《대종경》 부촉품3)고 설했다. 4월에는 여자수위단 조직을 내정하고, 5월 16일 예회에서 ‘생사법문’을 설한 다음 득병하여 치료하다가, 6월 1일 열반에 들어 개법(開法) 28년의 제도사업을 마감했다. 

이러한 소태산의 생애를 정산은 관천기의상(觀天起疑相), 삼령기원상(蔘嶺祈願相), 구사고행상(求師苦行相), 강변입정상(江邊入定相), 장항대각상(獐項大覺相), 영산방언상(靈山防堰相), 혈인법인상(血印法認相), 봉래제법상(蓬萊制法相), 신룡전법상(新龍轉法相), 계미열반상(癸未涅槃相)의 십상(十相)으로 정리하고 있다(《정산종사법어》 기연편18). 슬하에는 길선(吉善)과 광전(光田, 본명 吉眞)ㆍ광영(光靈, 요절)ㆍ광진(光振, 본명 吉緣)의 1녀 3남이 있으며, 광전은 전무출신했다. 

소태산의 법통(法統)은 종법사로 정산이 계승하고, 법사(法嗣)에는 교단창업에 헌신한 구인제자를 비롯하여 출가ㆍ재가의 많은 제자들이 있다. 열반 후 10년만인 1953년(원기38)의 제1대 결산에 의하면 출가교도인 전무출신 입등자 258명, 재가교도인 거진출진(居塵出塵) 입등자 1,496명으로 도합 1,754명이며,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소태산의 친견(親見)제자이다.

 

저술과 사상

 

소태산의 사상은 구세경륜으로 원불교의 교리를 이루고 있다. 그의 저술은 대각 초기인 구술(口述)시대의 가사(歌詞)와 한시집 《법의대전(法義大全)》(《대종경》 전망품2)을 비롯하여 다양하다. 성문화된 법설은 기관지인 《월말통신》ㆍ《월보》ㆍ《회보》 등에 수록된 수필법문(受筆法門)이 풍부하며, 저술은 《수양연구요론》ㆍ《불법연구회규약》ㆍ《보경육대요령》ㆍ《조선불교혁신론》ㆍ《예전》 등의 초기교서가 한결같이 그의 구세경륜을 담고 있다. 

이들 초기교서를 망라 정리하여 《불교정전》이 발행되었으며, 이에서 일제의 규제를 털고 재결집한 것이 원불교에서 원경(元經)으로 불리는 《정전》이다. 그가 설한 다양한 법문을 비롯하여 제도사업을 통해 드러난 언행이 통경(通經)으로 불리는 《대종경》이며, 그 밖의 원불교 교서 역시 직접 간접으로 그의 사상을 담고 있다. 소태산의 사상은 이들 교서들에 폭 넓게 담겨 있는데, 몇 가지 관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진리관은 근원적 진리를 일원상(◯)으로 상징하여 원불교 최고 종지로 삼게 했다. 이 하나일 수밖에 없는 근원적 진리를 그는 “천지만물의 본원이며 언어도단의 입정처(入定處)라, 유가에서는 이를 일러 태극(太極) 또는 무극(無極)이라 하고, 선가에서는 이를 일러 자연 또는 도라 하고, 불가에서는 이를 일러 청정법신불이라 했으나, 원리에 있어서는 모두 같은 바로서 비록 어떠한 방면 어떠한 길을 통한다 할지라도 최후 구경에 들어가서는 다 이 일원의 진리에 돌아가나니, 만일 종교라 이름하여 이러한 진리에 근원을 세운 바가 없다면 그것은 곧 사도(邪道)라”(《대종경》 교의품4) 했다. 

② 종교관은 사통오달하는 교법이라야 밝은 시대에 구세제인(救世濟人)의 본무를 다할 수 있다고 보았다. 과거처럼 한 시대 한 지역에 통용하는 가르침으로는 변화된 시대사회에서 생령을 효과적으로 건질 수 없다. 불법을 무상대도(無上大道)로 보는데 이는 “참된 성품의 원리를 밝히고 생사의 큰일을 해결하며 인과의 이치를 드러내고 수행을 길을 갖추어서 능히 모든 교법에 뛰어난 바가 있나니라”(《대종경》 서품3)고 하며, 다만 제도와 방편에 있어서는 혁신, 곧 불법의 시대화ㆍ대중화ㆍ생활화를 전제한다. 그는 자신의 교법이 너른 세계의 가없는 생령을 바르고 빠르게 건지는 최승(最勝)의 길로 보지만, 그 제도사업은 종교간에 넘나들며 서로 협력할 때 더 효과적이라 본다. 

③ 윤리관은 은사상(恩思想)으로 대변할 수 있다. 원불교 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사은(四恩), 곧 천지은(天地恩)ㆍ부모은(父母恩)ㆍ동포은(同胞恩)ㆍ법률은(法律恩)으로 구체화되며, 감사생활로 요약된다. 일원즉사은(一圓卽四恩)이며 사은즉삼라만상(四恩卽森羅萬象)으로 일원상 신앙의 체계가 여기서 확인된다. 

④ 수행관은 삼학(三學), 곧 정신수양(精神修養)ㆍ사리연구(事理硏究)ㆍ작업취사(作業取捨)로,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한다’는 삼학병진의 자력수행길을 밝힌다. 이를 일심ㆍ알음알이ㆍ실행, 공(空)ㆍ원(圓)ㆍ정(正)이나 양성(養性)ㆍ견성(見性)ㆍ솔성(率性)으로 표현하며, 이를 일원상 수행의 방법으로 본다. 

⑤ 과학관은 과학문명 곧 물질문명의 발달을 개벽(開闢)이라 표현하고 이를 선용할 정신의 개벽을 강조한다. 도학과 과학의 병진에 의해 참 문명세계가 도래하므로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물질의 세력을 항복받아,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정전》 개교의 동기)하는 것이 종교의 문을 연 동기라 밝히고 있다. 그는 “세상에 낙원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외형의 낙원이요, 둘은 내면의 낙원이다. 외형의 낙원은 과학이 발달되는 머리에 세상이 좋아지는 것이요, 내면의 낙원은 도학이 발달되어 사람사람이 마음 낙으로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 요순시대에는 내면의 낙원은 되었으나 외형의 낙원이 없었고, 현세에는 외형의 낙원은 되었으나 내면의 낙원이 적으니, 우리는 내외겸전한 좋은 낙원을 건설하기 위해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한 것이니라”(《대종경선외록》 주세불지장7)고 했다. 

⑥ 민족관은 일제의 침략을 받고 있지만 어변성룡(魚變成龍)의 시기에 있으며, 금강산의 주인으로서 장차 세계의 정신적 지도국, 인류도덕의 부모국이 될 것으로 본다. 일제의 핍박 아래서도 그들 또한 제도(濟度)의 대상으로 보며, “강자는 약자에게 강을 베풀 때에 자리이타법(自利利他法)을 써서 약자를 강자로 진화시키는 것이 영원한 강자가 되는 길이요, 약자는 강자를 선도자로 삼고 어떠한 천신만고(千辛萬苦)가 있다 하여도 약자의 자리에서 강자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진보하여 가는 것이 다시없는 강자의 길이니라”(《정전》 강자약자 진화상 요법)고 밝힌다. 

⑦ 정교관(政敎觀)은 정교분리와 신교자유에 바탕해 있다. 정치와 종교를 엄부(嚴父)와 자모(慈母), 서북풍과 동남풍, 또는 수레의 두 바퀴에 비유하며, 이를 정교동심(政敎同心)이라 했다.

 

인간상

 

소태산의 인간상을 최초 제자인 김광선은 “가장 흠모하여 배우고자 하나 능하지 못함이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순일 무사하신 공심이요, 둘은 시종 일관하신 성의요, 셋은 청탁 병용(竝容) 하시는 포용이라. 대저, 대종사의 운심처사(運心處事) 하시는 것을 뵈오면 일언일동이 순연히 공(公) 하나뿐이시요, 사(私)라는 대상이 따로 있지 아니하사, 오직 이 회상을 창건하시는 일 외에는 다른 아무 생각도 말씀도 행동도 없으시나니, 이것이 마음 깊이 감탄하여 배우고자 하는 바”(《대종경》 실시품47)라 했다. 

정산은 “대종사는 일찍이 광겁종성(曠劫種聖)으로 궁촌변지에 생장하시어 학문에 수습이 없었으나 문리를 스스로 알으시고, 사장의 지도가 없었으나 대도를 자각하셨으며, 판탕(板蕩)한 시국을 당했으나 사업을 주저하지 아니하시고, 완강한 중생을 대할지라도 제도(濟度)의 만능이 구비하셨으며 기상은 태산교악같으시나 춘풍화기의 자비가 겸전하시고 처사는 뇌뢰낙락(磊磊落落)하시나 세세곡절의 진정을 통해 주시며, 옛 법을 개조하시나 대의는 더욱 세우시고, 시대의 병을 바루시나 완고에는 그치지 않게 하시며, 만법을 하나에 총섭하시나 분별은 오히려 역력히 밝히시고, 하나를 만법에 사용하시나 본체는 항상 여여히 드러내사 안으로는 무상묘의(無上妙義)의 원리에 근거하시고, 밖으로는 사사물물의 지류까지 통하시어 일원대도(一圓大道)의 바른 법을 시방삼세에 한없이 열으셨으니, 이른바 백억화신(百億化身)의 여래(如來)시오, 집군성이대성(集群聖而大成)이시라”(〈소태산대종사비명〉)고 밝히고 있다.〈梁賢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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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818063402712_731.jpg<소태산 대종사>
출처 : 원불교 대사전 <http://www2.won.or.kr/servlet/wontis.com.root.OpenChannelServlet?tc=wontis.dic.command.RtrvDicRmrkCmd&search_cls=&search_string=&dic_no=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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