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딤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천주교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딤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일요시사 0 3141
한국교회는 그분의 용기와 열정위에 세워졌다.

성인 중에 김대건 신부님 만큼 우리의 가슴에 뭉클하게 와닿는 이름도 없을 것이다. 베드로나 바오로와 같은 이름도 우리에게 크나큰 이름이지만, 김대건은 피를 함께 나눈 우리의 조상이요, 우리 민족의 정과 한을 담은 이름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상생활 불과 25년, 사제생활 13개월, 너무나 짧앗던 생애였기에 더욱 가슴이 시린 것 같다. 하지만 이 짧은 생애는 그 어느 성인보다도 우리에게 강렬하게 와 닿고,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김대건 신부님은 다른 사람보다 능력이 특출 나거나, 재능이 유달리 출중한 사람은 아니었다. 육신은 허약체질이었고 잔병치레를 자주했다. 옥중에서 남긴 편지에는 북경에 있던 주교님께 어머니를 걱정하고 부탁하는 인간적인 정을 보이기도 했다. "주교님 감히 주교님께 저의 어머니를 부탁드리옵니다. 공경하올 주교님 엎디어 하직 인사를 올립니다. 천국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지금부터 190여 년전인 1821년, 충남 당진군 솔뫼마을에서 태어난 김대건은 성품이 굳세고 열심한 신덕을 가졌다. 15살 때인 1836년 12월 3일, 최양업 도마,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세 사람이 뽑혀 사제가 되기 위해 머나먼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마카오는 홍콩 옆에 있는데 당시에 신학교가 있었다. 나는 마카오에 두 번 갔다 왔는데 지금은 신학교는 없고 그 자리에 김대건 신부님 동상이 서있다. 서울에서 마카오까지 만주와 요동땅을 거쳐가는 데만 6달, 숱한 고생끝에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마카오는 먼 곳이었다. 그 곳에서 10년 동안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시고, 1845년 8월 17일, 24살 때 우리민족으로서는 처음으로 상해김가항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8월 24일 인근 횡당성당에서 감격적인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리고 8월 31일 라파엘호를 타고 한국으로 출발,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기착하였고, 10월 12일 충남 강경 황산포에 상륙하여 11월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 후 한국에 돌아오신지 8개월, 박해로 쓰러진 조선교회를 위해 바쁘게 일하시다가 또 다른 신부님을 중국에서 모셔오기 위해 황해도 해안에서 조기잡이 어부로 위장하여 순위도라는 섬에서 머무르시다가 1846년 6월 5일 관헌에 체포되고 말았다. 

포졸들은 마구 때리고 포박하여 해주관가로 압송했다. 관장이 심문하였다. '네가 천주교인가?' '그렇소' '천주교는 나라에서 금한 종교다. 배교하여라.' '나는 천주교가 참된 종교이기에 받듭니다. 천주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요.' '우리에게는 유교가 있다.' 그리고 봇짐물건을 수색하다가 중국 물건이 나오니까 물었다. '너는 중국인인가?' '나는 조선인이고, 중국 마카오에서 공부하였소.' 관장은 매질을 하고 6월 21일 서울로 압송했다. 서울 포도청, 관장이 심문하였다. '너는 누구인가?' '나는 조선 사람으로 중국에서 천주교를 공부하였소.' 관장은 계속해서 누구냐고 물었다. 그 때 포청에서는 이미 10년 전에 조선소년 세 사람이 천주교 지도자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같이 붙잡힌 교우들이 이미 김대건이 누구라는 것을 실토하였기에 더 이상 신분을 감출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하고 김대건은 관장에게 ' 나는 그 소년 셋 중의 하나인 김안드레아요.' 하고 자백하면서 그 동안의 일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관장은 이 말을 듣고 '가련한 사람... 어려서부터 허다한 고생을 많이도 하였구나.' 하고 안타까워 하였다.

이 후 김대건은 영어로된 세계지도를 번역해주기도 하고, 프랑스군함으로부터 받은 편지도 변역해주고, 세계정세에 대해 여러가지 정보를 조정에 알려주었다. 옥중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았기에 재판관과 대신들은 임금에게 '사형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조정의 많은 대신들은 김대건의 지식과 재능을 보고 살리기를 간청하였으나, 영의정과 몇몇 중신들이 끝까지 참수를 주장하여 결국 3달 만에 순교하게 되었다. 기차로 서울을 가다보면 한강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 편에 새남터와 기념관이 보인다. 새남터... 숱한 순교자들이 그 곳에서 순교 하였고, 김대건 신부님도 그 곳에서 1846년 9월 16일 순교하였다.

신부님은 옥중에서 교우들에게도 편지를 남겼다. '교우들 보아라.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나서 우리를 내신 천주님을 알지 못하면 아무 보람이 없는 것이다. 조선에 교회가 들어온지 5, 60년에 여러 번 박해로 환난을 당하니 애통하고 육정에 차마 이별하기 어렵도다. 우리 주 예수 세상에서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셨으니, 주의 뜻을 따라 이 황망한 시절 마음을 늦추지 말고, 힘을 다하고 용맹하게 세속마귀를 싸워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말고 서로 돕고 천주공경에 정진하라. 이 난세를 맞아 천주께서 환난을 거두어주실 때까지 신앙을 증거 하라. 천주 오래지 아니하여 더 착실한 목자를 보내주실 것이니 너무 서러워 말지어다. 할 말이 무궁치만 어찌 지필로 다하리. 우리 모두 천국에서 다시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참수처형 후에 시신은 가묘에 묻혀 있다가 40일 후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교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시신을 거두어 어깨에 메고 밤길을 걸어 10월 26일 경기도 미리내산에 안장하였다. 그 후 1901년 5월 21일 서울 용산 천주교 신학교성당으로 옮겨 모셨다가, 1951년 서울 혜화동 카톨릭대학교 성당에 모시게 되었다. 숱한 고생 끝에 신품을 받고 채 피어나지도 못한 채 순교하신 김대건 신부님은 우리 한국교회의 귀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리하여 조선 천주교회는 우리나라 첫 평신도회장인 정약종, 제일 먼저 우리나라에 오신 중국인 신부님 주문모 신부님, 제일 먼저 우리나라에 오신 프랑스 주교님인 모방주교님, 제일 먼저 우리나라 신부님이신 김대건 신부님이 모두 순교함으로써 한국교회는 그야말로 순교자의 피 위에 그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1925년 7월 5일, 교황님은 신부님을 복자품에 올리셨고, 1949년 11월 15일, 신부님을 한국성직자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하였다. 1984년 5월 6일, 교황님은 신부님을 성인품에 올리면서 한국의 대표성인으로 선포하셨다.

오늘 한국의 모든 성직자들이 김대건 신부님의 모범을 본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다. 또 쉽게 신앙을 버리는 우리의 나약한 신앙도 반성해야겠다. 조금만 인간적인 어려움이 닥치거나, 성직자나 수도자와 마음이 안맞고, 또 신자들 사이에서 서로 싸우고, 아니면 귀찮다고, 세상일에 바쁘다고, 너무도 쉽게 신앙을 버리는 것이 오늘의 세태인 것 같다.

저 세상이 없고 이 세상이 전부라면... 우리의 삶은 너무나 허무할 것이다. 우리는 저 세상을 믿고 천지를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믿는다. 세상 삶이 고단하고 힘든 일이 많겠지만 김대건 신부님과 같은 굳건한 정신으로 이겨내야 하겠다.

신부님의 삶도 우리 주님처럼 결코 편안한 삶이 아니었다. 그 삶은 모진 고통과 역경을 이겨내야 했던 눈물겨운 삶이었다. 참으로 신부님의 삶은 우리는 '아무리 짓눌러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고,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라고 하신 바오로사도처럼 결코 흔들리지 않는 강건함이 잇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떼어놓을 수 잇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가, 굶주림입니까.' 라는 강인한 정신을 가졌던 바오로사도처럼 신부님도 강건한 정신이 있었다. 그 강건함을 우리도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청해야겠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한국의 모든 순교성인성녀들이시여,

저희를 위해 빌으소서. 아멘.

<월간 성가정 201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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