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또 하나의 예수님입니다/ 손용환 신부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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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1 13:25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ffer, 1906∼1945)는 독일 고백교회의 목사이자 신학자입니다. 그는 묻습니다. “왜 사람들이 교회에 오지 않는가?” 그의 답변은 간결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해서.” 그는 갈등했습니다. “히틀러 정권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유다인을 보호해 줄 것인가? 사회의 잘못을 눈 감고 살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잘못을 바로잡고 생명을 구하는 교회가 될 것인가?”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미친 사람이 모는 차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것만이 나의 과제는 아니다. 이 미친 사람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이 나의 과제이다.” 그래서 그는 히틀러 정권 하에서 반나치스운동을 펼쳤으며,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자 1943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베를린의 터겔형무소에 수감됩니다. 그는 수감된 동안 히틀러 암살계획을 세우고, 1944년 7월 20일 스타우펜베르크 대령 등과 함께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 암살계획은 실패했고, 그는 1945년 4월에 플뢰센베르크의 수용소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가 옥중에서 쓴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는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줍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종종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내 모습이, 어찌나 침착하고, 활기차고, 당당한지, 마치 자기 성에서 나오는 왕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또한 말하기를, 불행한 나날을 견디는 내 모습이, 어찌나 평온하고, 미소 지으며, 자연스러운지, 마치 승리에 익숙한 투사 같다는데.
나는 정말 다른 이들이 말하는 그런 존재인가? 아니면 다만 나 자신이 알고 있는 자에 지나지 않는가?
새장에 든 새처럼 불안하게 뭔가를 갈망하다 병이 든 나, 목을 졸린 사람처럼 살고 싶어 숨 가쁘게 몸부림치는 나, 햇볕과 꽃들과 새소리에 주리고, 부드러운 말과 따뜻한 말동무를 그리워하며, 사소한 모욕에도 분노를 일으키고, 석방의 말을 안타깝게 고대하다 지친 나, 멀리 있는 친구의 신변을 염려하다 지치고, 이별에도 지쳤으며, 어제는 기도에도, 생각과 일에도 지쳐 공허하게 된 나, 이것이 내가 아닌가?
나는 누구인가? 이 고독한 물음은 나를 비웃는다. 내가 누구이건, 오, 하느님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본회퍼는 남들이 말하는 내가 나인가, 아니면 내 자신이 알고 있는 내가 나인가를 묻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본회퍼를 어떻게 평가할까요? 사람들에게 비춰진 모습에 따라 평가되지 않을까요? 남들이 말하는 내가 진정한 나 아닐까요?
요한도 감옥에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마태오 11,3) 하고 묻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오 11,4-6)
그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행실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모습을 행실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분은 눈먼 이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눈먼 이들을 보게 해야 합니다. 탐욕에 눈먼 사람들을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분은 다리 저는 이들을 제대로 걷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리 저는 이들을 제대로 걷게 해야 합니다. 이기심으로 균형을 잃어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람들을 너그러움으로 걸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분은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교만함의 종기로 더럽혀진 사람들을 겸손의 약으로 깨끗하게 치유해야 합니다.
그분은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해야 합니다. 자기 이야기만 하고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귀먹은 사람들에게 경청하여 그들도 듣게 해야 합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을 되살리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죽은 이들을 되살려야 합니다. 살맛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 살맛나게 해야 합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의 몸을 양식으로 먹습니다. 그래서 그분과 한 몸을 이룹니다. 그분이 우리가 되고, 우리가 그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에 보이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실로 예수님은 평가받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또 하나의 예수님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종종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내 모습이, 어찌나 침착하고, 활기차고, 당당한지, 마치 자기 성에서 나오는 왕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또한 말하기를, 불행한 나날을 견디는 내 모습이, 어찌나 평온하고, 미소 지으며, 자연스러운지, 마치 승리에 익숙한 투사 같다는데.
나는 정말 다른 이들이 말하는 그런 존재인가? 아니면 다만 나 자신이 알고 있는 자에 지나지 않는가?
새장에 든 새처럼 불안하게 뭔가를 갈망하다 병이 든 나, 목을 졸린 사람처럼 살고 싶어 숨 가쁘게 몸부림치는 나, 햇볕과 꽃들과 새소리에 주리고, 부드러운 말과 따뜻한 말동무를 그리워하며, 사소한 모욕에도 분노를 일으키고, 석방의 말을 안타깝게 고대하다 지친 나, 멀리 있는 친구의 신변을 염려하다 지치고, 이별에도 지쳤으며, 어제는 기도에도, 생각과 일에도 지쳐 공허하게 된 나, 이것이 내가 아닌가?
나는 누구인가? 이 고독한 물음은 나를 비웃는다. 내가 누구이건, 오, 하느님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본회퍼는 남들이 말하는 내가 나인가, 아니면 내 자신이 알고 있는 내가 나인가를 묻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본회퍼를 어떻게 평가할까요? 사람들에게 비춰진 모습에 따라 평가되지 않을까요? 남들이 말하는 내가 진정한 나 아닐까요?
요한도 감옥에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마태오 11,3) 하고 묻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오 11,4-6)
그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행실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모습을 행실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분은 눈먼 이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눈먼 이들을 보게 해야 합니다. 탐욕에 눈먼 사람들을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분은 다리 저는 이들을 제대로 걷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리 저는 이들을 제대로 걷게 해야 합니다. 이기심으로 균형을 잃어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람들을 너그러움으로 걸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분은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교만함의 종기로 더럽혀진 사람들을 겸손의 약으로 깨끗하게 치유해야 합니다.
그분은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해야 합니다. 자기 이야기만 하고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귀먹은 사람들에게 경청하여 그들도 듣게 해야 합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을 되살리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죽은 이들을 되살려야 합니다. 살맛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 살맛나게 해야 합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의 몸을 양식으로 먹습니다. 그래서 그분과 한 몸을 이룹니다. 그분이 우리가 되고, 우리가 그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에 보이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실로 예수님은 평가받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또 하나의 예수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