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역사 (2) 초기 교회사의 전개(1784∼1876년)

천주교


 

한국교회의 역사 (2) 초기 교회사의 전개(1784∼1876년)

일요시사 0 1849

 

2-1. 초기의 신앙 공동체(1784-1801년)

 

교회 창설 직후 복음 선교에 앞장선 인물로는 이승훈, 이벽, 권일신이 있다. 권일신의 제자인 이존창(李存昌, 1752~1801년)은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였고, 전주에서는 유항검(柳恒儉, 1756~1801년)이 신앙을 전파해 갔다. 이 밖에도 많은 신자들이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여 이를 기쁘게 실천하면서 교회 발전을 위하여 자신의 힘을 바쳤다. 
이렇게 출발한 우리나라 천주교회는 창설 직후부터 탄압에 직면하게 된다. 1785년 봄, 형조(刑曹)의 관리들은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적 모임을 하고 있던 신자들을 검거하였으나 체포된 사람들 대부분이 양반인지라 방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형조는 양반의 범죄를 다스릴 수 없었다. 그러나 함께 체포된 신자 가운데 중인 출신인 김범우는 고문을 하고 유배를 보냈다. 귀양을 살던 김범우는 고문받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 
이러한 탄압에도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오히려 조직을 다져 나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1786년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설정하기까지 하였다. 가성직 제도는 성품성사를 받지 아니한 신자들이 성직자의 고유한 업무까지 수행하던 비합법적 제도를 말한다. 이를 가성무집행 제도(假聖務執行制度)라 하기도 한다. 고해성사와 견진성사 그리고 미사 집전은 성직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를 미처 알지 못한 당시 신자들은 미사와 고해성사 등을 집전하였다. 이 가성직 제도 아래에서 이승훈은 교회의 으뜸가는 지도자가 되었고, 모두 10여 명의 신자가 신부로 추대되었다. 가성직 제도는 교회법으로는 올바른 일이 아니나, 교회 조직을 갖추어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고 선교를 강화해 보려는 소박한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다. 
가성직 제도는 1789년경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천주교 교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나가면서 가성직 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하게 되었고 이에 관해 북경 주교에게 문의한다. 1790년에 도착한 답변에서 북경 주교는 가성직 제도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조선에 선교사 파견을 약속하는 한편,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였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선교사를 맞이하는 기쁨과 조상 제사 문제로 벌어질 상황에 대한 우려를 동시에 갖게 되었다. 
조선 왕조에서 장자(長子)에 대한 제사 상속권 강화를 기반으로 하여 양반 사족들이 본격적으로 사대 봉사(四代奉祀)를 하게 된 시기는 17세기 이후다. 조상 제사는 당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인정되던 효심의 자연스런 표현으로, 사대 봉사는 양반 신분의 상징이다. 사족들은 사대 봉사를 통해서 팔촌친(八寸親) 공동체를 형성하여 변동하는 사회에 대처해 가고 있었다. 이렇듯 조상 제사는 양반 가문의 사회적 결속과 존립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 때문에 조상 제사 금지는 양반 사족 출신 신자들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조상 제사 포기는 양반으로서 명망과 특권을 버리고, 가문을 존립시키는 사회적 기반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천주교 신자에 대한 정부의 탄압에 앞서서 양반 문중의 박해가 심각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이때 사대봉사를 하던 양반층 신도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이 새롭게 터득한 천주교 신앙을 버리고 자신이 원래 속한 유교 문화로 재편입해 가면서 초기 교회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한 양반들도 탈락하였다. 따라서 1790년대 이후에는 교회를 이끄는 지도급 신자들도 바뀌었다. 양반층 신자들이 탈락한 반면, 양반으로서 특권을 포기하고 조상 제사를 거부하며 자신의 신앙을 지킨 사람들과 중인 이하의 인물들이 교회를 지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조상 제사를 거부한 윤지충(尹持忠, 1759~1791년)과 권상연(權尙然, 1750~1791년)은 1791년에 순교하였다. 그들은 우리 교회사에서 첫 순교자들로 기록되었다. 그들의 순교로 양반층 신자들이 빠른 속도로 탈락해 나가면서 1791년의 박해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양반 지식층이 주도하던 종교에서 민중들의 종교 운동으로 그 성격이 전환되어 갔다. 
한편 북경의 주교는 조선 신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794년 주문모(周文謨, 1752~1801년) 신부를 파견하였다. 중국인 성직자로서 조선에 파견된 그는 조선의 신생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였다. 그의 노력과 신자들의 전교 활동으로 조선 교회는 크게 발전하면서 신자 수가 1만여 명에 이르게 된다. 이때 신자들은 주로 경기와 충청도, 전라도 지방에 분포되어 있었다. 
주문모 신부가 전교 활동을 하고 있음을 탐지한 조정에서는 그를 체포하고자 하였다. 이때에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했던 윤유일(尹有一, 1760~1795년), 최인길(崔仁吉, 1764~1795년), 지황(池璜, 1766~1795년)과 같은 신자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강완숙(姜完淑, 1760~1801년)을 비롯한 신자들의 보호로 주문모 신부는 계속해서 활동할 수 있었다. 
주문모 신부가 들어온 이후 일부 지역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소규모의 탄압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 탄압 가운데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신앙을 증언하는 신자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그리고 신자들은 명도회(明道會)와 같은 신심 단체를 조직하여 서로 교리를 익히고 자선 활동을 하면서 이웃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명도회의 초대 회장은 정약종(丁若鍾, 1760`~1801년)이다. 그는 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순수한 한글로 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천주교 교리를 요약하여 제시해 준 정약종은 1801년의 박해 때에 순교하였다. 
그러나 초기 교회는 조직적으로는 차츰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최창현(崔昌顯, 1754~1801년)은 ‘총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교회 조직과 발전에 초석을 놓았으며, 강완숙과 윤점혜(尹占惠, 1776~1801년)는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기 위한 여성 결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당시 교회에서 ‘여회장'(女會長)으로 불렸다. 그리고 충청도 지방에서 활동하던 정산필(鄭山弼, ?~1801년)이나 ‘김승정'의 경우처럼 지방에서도 ‘회장'을 임명하였다. 이 회장들은 주문모 신부가 교회 조직을 정비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임명하였다.

 

2-2. 초기 교회에 대한 박해(1801∼1831년)

 

1784년 교회가 세워진 이후 얼마 아니 가서 신자의 숫자가 1,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세워진 지 10년 뒤에는 대략 4,000명의 신자가 신앙을 실천하고 있었다. 또한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이후 교세는 더욱 발전하여 1800년에는 대략 1만여 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신자들은 대부분 정치적 특권이 없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힘없는 민중들이었으며, 여성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교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천주교를 반왕조적(反王朝的) 종교로 규정한 집권층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일대 탄압을 단행한다. 1801년에 단행된 박해는 나이 어린 교회를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으니, 이 박해로 말미암아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였다. 이때 주문모 신부는 중국으로 피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이 피하면 신자들이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되리라는 생각에 순교의 길을 택하였다. 
이 박해의 와중에서 교회의 지도자인 신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한다. 당시 교회의 총회장 최창현과 명도회 회장 정약종, 그리고 충청도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 이존창과 유항검이 이때 순교하였으며, 강완숙, 이순이(李順伊, 1781~1801년) 등과 같은 여성 신자들도 이때 순교하였다. 또한 이 박해에서는 앞서 배교를 선언했던 이승훈, 김건순(金建淳), 이희영(李喜英)과 같은 인물들도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정약용을 비롯하여 배교를 선언한 대부분의 신자들은 사형을 면하고 귀양을 떠나거나 방면되었다. 
이때 황사영(黃嗣永, 1775~1801년) 백서 사건이 발생한다. 초기 교회에서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황사영은 박해가 발생하자 이를 피하여 제천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그는 북경의 주교에게 조선의 박해 상황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려 하였다. 이 편지는 도중에 발각되었고 그도 체포되었다. 편지 내용에는 조선 왕조의 존재를 부인하고 외국 세력의 개입을 요청하는 강경한 말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조정은 천주교의 성행에 대하여 더욱 긴장하게 되었다. 그는 ‘신앙의 자유'라는 정당한 목적을 가지고 백서를 작성했지만, ‘무력적 외세'라는 부당한 방법을 제안하였고, 이 때문에 그의 행동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인색하게 되었다. 결국 황사영도 자신의 행위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다. 
1801년의 박해로 말미암아 교회는 큰 타격을 받았으나, 이 박해는 천주교 신앙을 더욱 널리 전파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니, 박해를 피해 각처로 흩어진 신자들은 피난처에서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해 나갔다. 경상도나 강원도로 이주한 내포 지방 신자들은 비밀리에 신앙을 실천하면서 그 지역에 천주교 신앙의 씨를 뿌렸던 것이다. 
박해가 끝난 이후 신자들은 교회 재건을 위하여 온 힘을 쏟았다. 당시 교회 재건에 힘쓴 신자들 가운데는 순교자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丁夏祥, 1795~1839년) 등이 있었다. 1801년의 박해 때 배교를 하고 귀양을 살던 정약용도 1811년 이후 교회 재건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북경의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어 선교사 파견을 간청하였으며, 로마 교황청에까지 편지를 보내어 그들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며, 주교 파견을 간청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교회 재건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으나 천주교에 대한 조정의 박해는 일부 지방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꾸준히 교회 재건 운동을 전개한 결과 조선 교회는 중국인 여항덕(呂恒德: 異名 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맞아들일 수 있었다. 그는 조선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선교하였다. 그러나 그는 뒷날 프랑스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하게 되자 이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중국으로 귀환하였다.

2-3. 조선 교구의 설정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됨으로써 우리나라 교회는 북경교구의 관할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교구가 설정된 것은 조선인 신자들의 꾸준한 청원과 파리 외방 전교회의 응답에 따른 결과였다. 조선인 신자들의 청원을 받은 로마 교황청에서는 조선에 교구를 설정하고자 했고, 파리 외방 전교회에 소속된 브뤼기에르(Brugière, 1792~1835년) 주교는 조선 선교를 자원하였다. 그는 조선교구 제1대 교구장이 되어 조선에 입국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으나 새로운 사목지를 눈앞에 두고 중국 땅에서 병사하였다. 그리고 그의 뜻을 이은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이 1835년 이후 조선에 입국하였다. 조선에 입국한 이들은 신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였으며 조선 교회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 결과 신자들의 숫자가 늘어 갔으며, 그들의 신앙도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1839년 다시 박해를 일으키어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년) 주교를 비롯한 3인의 프랑스 선교사들을 체포·처형하였다. 이때 순교한 신자들로는 유진길(劉進吉, 1791~1839년) 등을 들 수 있다. 정하상이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 신앙을 변호한 것도 바로 이 박해에서였으며, 그 또한 이때 순교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는 조정의 천주교 탄압이 국내 문제에만 그치지 않고 국제 문제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에 들어온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김대건(金大建, 1821~1846년), 최양업(崔良業, 1821~1861년) 등을 선발하여 중국의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하였다. 그 후 김대건은 한국인 최초로 사제로 수품되어 국내에 돌아와 활동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몇몇 신자와 함께 선교사를 맞이할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하고자 노력하다가 체포되어 1846년에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를 전후하여 프랑스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조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최양업도 사제가 되어 귀국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산간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성사를 집전하면서 교우들의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또한 교리 내용을 쉽게 알려 주기 위하여 「사향가」(思鄕歌)를 비롯한 천주교 가사를 지어 부르게 하였는데, 이러한 천주교 가사는 신자들의 묵상 자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교 과정에서 과로로 병을 얻어 죽었다. 
이처럼 선교사들과 조선인 성직자 그리고 신자들의 노력으로 교회는 발전되어 갔다. 교회 초기부터 1860년대에 이르는 기간의 신자 수는 다음 <표 1>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표 1> 박해 시대의 교회 현황

연도신자 수외국인 선교사조선인 신부
17891,00000
17904,00000
179610,00010
185916,70081
186523,000160

 

1860년대 초의 교회는 거듭된 박해에도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이에 고종의 후견인으로 정권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 이하응은 천주교가 성행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았다. 대원군은 정권을 장악한 직후 왕실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국가 체제를 한층 강화하고자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는 사상을 정비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에 그는 지방 유림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철폐하기에 앞서, 이단으로 지목되던 천주교부터 척결하고자 하였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상의 순결성을 먼저 과시하면서, 사족(士族)들을 위압하려 한 듯하다. 
대원군은 1866년부터 1874년 그가 하야할 때까지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대원군 집권기에 천주교 박해가 심했던 기간은 1866년 이후 3년 동안이었다. 이 박해 과정에서 조선에서 선교하던 12명의 프랑스인 가운데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년) 주교, 다블뤼(Daveluy, 安, 1818~1866년) 주교를 비롯하여 아홉 명의 선교사가 순교하였다. 이에 1866년 프랑스 해군은 병인양요(丙寅洋擾)를 도발하여 강화도를 침략하고 약탈을 감행하였다. 
또한 1868년에는 흥선 대원군의 생부(生父)인 남연군(南延君) 묘를 파묘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에는 박해를 피해서 중국에 피신해 있던 페롱(Féron, 1827~1903년) 신부가 개입되었다. 이 도굴 미수 사건의 여파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더욱 혹독하게 전개되어, 충청도 해미에서는 많은 신자를 생매장 학살하기까지 하였다. 
1866년에 시작되어 3년여에 걸쳐 집중적으로 진행된 이 박해 과정에서 남종삼(南鍾三, 1817~1866년), 홍봉주(洪鳳周, ?~1866년) 등 많은 신자가 신앙을 증언하고자 순교하였다. 또 제너럴 셔먼 호(號) 사건을 빌미로 삼아 1871년 미국 해병대가 강화도를 침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신미양요(辛未洋擾)로 외세와 결탁된 것으로 간주되던 천주교는 또다시 탄압을 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사에 기록된 큰 박해로는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1846년의 병오박해(丙午迫害),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를 들 수 있다. 이렇게 100여 년 동안 이어진 박해 과정에서 순교한 사람 가운데 오늘날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대략 1,800여 명에 이른다. 물론 이들 외에도 무명의 순교자들이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천주교 박해 과정에서 순교한 사람의 숫자가 얼마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지금 파악하고 있는 이 숫자 외에도 더 많은 순교자가 있으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순교자들 가운데 1839년의 박해와 1846년의 박해 때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 이하 79명은 1925년 로마에서 복자로 선포되었다. 또한 1866년의 박해 때에 순교한 이들 가운데 24명도 1968년 로마에서 시복되었다. 이들 103명의 복자들은 1984년에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이로써 세계 교회는 103명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한국 순교자를 확실히 기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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