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사람들(39) 맨발이면 청춘이다

문학의 향기


 

글쓰는 사람들(39) 맨발이면 청춘이다 <글_메이>

일요시사 0 3000

<사진: 김인식> 

 

신발을 벗었다. 맨발로 풀 위를 나선다. 어젯밤 내린 서리로 잔디가 촉촉하다. 평일인 데다 이른 새벽이라 아무도 없다. 초록 들판이 흰 꽃이 핀 것처럼 펼쳐져 있다. 뒤를 돌아보니 내 발자국이 길을 만들어 내고 있다.

 

2번 홀을 지났건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처음 내디뎠을 때의 차가움은 금세 사라지고 맨발로 느껴지는 풀의 촉감이 좋다. 새들의 청아한 합창이 이른 아침의 고요를 깨운다.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아무도 없는 골프장에서 맨발로 라운딩하는 기분이 상쾌하다.

 

오래전 뉴스에서 모 재벌 회장이 스키장을 통째로 빌려 즐겼다는 기사가 떠오른다. 그 회장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지만 엄연히 다르다. 그는 돈으로 다른 사람의 즐길 권리를 사 버린 거지만 나는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이런 호사를 누린다.

 

벽보에 내 이름이 올랐다. 4등이란다. 한 달 동안 열심히 운동한 열 명을 선정해 짐(Gym) 벽보에 붙인다. 운동에 중독된 것처럼 31일 동안 28일 거의 날마다 가다시피 했다.

 

한동안 짐에서 개설한 스피닝 클래스에 푹 빠져 살았다. 정지되어 있는 자전거를 강도를 조절하며 타는 운동이다. 오르막을 오를 때는 숨이 멎을 것처럼 힘들다가도 내리막을 달릴 때는 한결 발동작이 가볍다. 1시간 운동을 하고 나면 등 뒤로 땀이 송송 맺힌다.

 

나는 평소 웬만한 더위에도 땀을 잘 흘리지 않는다. 그런데 스피닝을 할 때면 등 뒤에 흐르는 땀방울이 전해져와 짜릿하다. 중간중간 옆을 흘깃 쳐다보면 빗물처럼 쏟아져 내리는 땀을 연신 주체 못하는 사람들이 거의 다다. 그게 바로 운동에서 오는 쾌감일까. 운동할 때는 힘든 모습이 역력하지만 운동 후 자신을 대견해 할 것이다. 이겨냈음을 말이다.

 

스피닝 클래스가 없는 날은 러닝 머신에서 에너지를 태웠다. 각도를 약간 오르막으로 하고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숨이 찰 정도가 되면 평소 걸음으로 걷는 걸 반복한다. 그렇게 몇 세트를 하다 보면 한 시간이 금방 간다. 그렇게 몇 달을 열심히 운동하다 보니 실내보다는 실외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7년 전 이민 올 당시 이삿짐 속에는 골프채가 있었다. 집이 서쪽 끝 다소 시골인 데다 큰길에 있어 가끔 예상치 못한 이들의 방문을 받았다. 기름이 떨어졌다며 불쑥 들어와 놀라게 한다든지, 허리를 반쯤 구부린 채로 살금살금 들어와 도둑고양이처럼 집 주위를 살피곤 했다. 그중에 체격이 큰 데다 생김새까지 험상궂으면 괜히 무섭기까지 하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에 아이언 골프채를 호신용으로 방 입구마다 하나씩 두었다.

 

염소젖이 아토피 치료에 좋다고 해 막내를 위해 염소를 키운 적이 있다. 영리한 염소는 내가 잠시 한눈을 팔면 텃밭으로 달려가 애써 키운 가족의 먹거리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때 드라이브는 염소에게 위협용으로 사용된다. 그럴 때면 심술이 난 염소는 뒷발을 들어 힘들게 짠 우유 통을 엎어 버렸다.

 

남들은 뉴질랜드가 골프의 천국이라고 하지만 난 골프채를 이렇게 호신용으로, 때론 위협용으로 사용했다.

 

공부하고 일하느라 이곳에 온 지 17년의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가 버렸다. 어느새 중년이 되어보니 건강을 돌아보라는 신호가 몸 여기저기서 온다. 그래서 시작한 운동이었지만 이제는 자연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다시 골프를 시작했다.

 

날마다 일을 해야 하기에 삶의 균형을 잘 맞춰야겠다는 생각이다. 신조어로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란 말도 생겨나지 않았는가. 일만 할 것이 아니라 건강도 챙길 수 있는 것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에 빠진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운동도 너무 무리해선 안 된다.

 

마침 직장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골프장이 있다. 일주일에 3번, 9홀을 도는 조건의 1년 회원권은 짐에서 1년을 운동하는 것 보다 훨씬 금액이 적다. 마침 지인이 새로 골프채를 장만했다. 그 덕에 난 맛있는 저녁으로 그 값을 지불하고 골프채를 얻었다.

 

제일 많이 사용한다는 7번 아이언이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 대회에 나갈 일도 없을 것 같고 선수로 데뷔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냥 푸른 자연 속에서 어릴 때 자치기하듯 휘두르며 걸으면 된다. 그렇게 나의 새로운 운동은 시작되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가방 깊숙한 곳에서 전화벨 소리가 나지막이 들린다. 한국에서 걸려온 친구 전화다. 어디냐고 물어 골프장이라 답했다. 30년 전 함께 골프를 시작한 친구다. 골프광이었던 그는 잘했다며 이번에는 쉬지 말고 꾸준히 해보라며 응원한다. 한 주에 3번 운동한다는 내 말에 경제적 지출이 심하겠다는 친구에게 자랑하듯 늘어놓는다.

 

“한국에서 라운딩 다섯 번 할 돈이면 지금 나처럼 9홀 1년 회원권을 살 수 있고 운 좋으면 이렇게 골프장을 통째로 사용할 수도 있어. 나 이런 나라에서 살아!”

 

친구의 부러워하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올 때 즈음 친구가 쌤통을 부린다.

 

“30년 전에 골프를 쳤다고는 하지만 다시 레슨을 받아야 해. 여자는 뭐니 뭐니해도 폼이야. 처음부터 다시 배워!”

 

골프장이 꼭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고 운동하는 나에게 친구가 폼을 운운한다. 친구의 김 새는 말은 냇가에서 물놀이 하는 나에게 다이빙 자세를 요구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싶다.

 

마지막 9홀에서 티에 공을 올린다. 드라이브로 세차게 내려쳤다. 청명한 소리와 함께 높이 뜬 공은 저 멀리 훨훨 나는 연 같다.

 

“나잇 샷!” 

 

나 혼자 외친다. 폼이고 뭐고 내가 행복하면 되는 것 아닌가.

 

 

 

‘글쓰는 사람들’은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한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한 달에 두 번 모여 좋은 글을 나누며 글쓰기도 하고 있습니다. 네 명이 번갈아 가며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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