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사람들(3)] 상처

문학의 향기


 

[글쓰는 사람들(3)] 상처

일요시사 4 1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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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 문이 열린다. 그 너머 들려오는 한마디. 

“이 방이 아닌가 보네.”

문이 닫히려는 순간 “엄마, 엄마 나야”하는 힘겨운 신음을 내뱉는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듯 얼굴 전체에 하얀 붕대가 감겨 있다. 침묵이 한참 흐른 후에 흐느끼는 소리만이 방을 가득 메운다.

 

1986년 1월 4일. 며칠 동안 내린 눈으로 바깥세상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래서인지 흰 눈과 대비되는 검정 옷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속옷부터 신발까지 모두 검정으로 한껏 멋을 내고는 집을 나섰다. 현관 앞 거울을 보며 무심코 던졌다.

“왜 온통 검정이야?”

화려함이 잘 어울리는 은희가 몰고 온 차의 조수석에 앉으라며 손짓한다. 우리는 새해를 맞아 현경이와 저녁을 먹기 위해 송탄으로 향했다. 미군 부대 안에 있는 레스토랑이다. 그곳에서 맛난 식사와 볼링을 즐기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그사이 어둠은 시작되었고 은희와 난 서울로 향했다.  

 

잠시 졸았나 보다 하고 느끼는 사이 차는 몇 바퀴를 도는가 싶더니 낭떠러지로 내달린다. 순간 공포감이 엄습해오며 짧은 비명과 함께 얼굴 곳곳이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터졌다 하는 반복이 느껴졌다. 내 몸이 이리저리 허공에 날리며 차 안의 좁은 공간 속에서 옮겨 다니는가 싶더니 차가 멈췄다. 몸은 깨진 앞자리 유리 창문에 반쯤 걸려있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생각이 멈춘 사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

“그 아래 살아있나요?” 

있는 힘을 다 내어 들리는 듯 말 듯 맘속으로 내어본다. 

“살려주세요!” 

서울로 향하는 응급차 속에서 보건의는 내 손을 잡고 괜찮을 거라며 위로를 건넨다. 하지만 예의 직업 때문일까. 냉정함을 잃지 않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혹시 모르니 누군가에게 전할 말이 있으면 하란다. 먹먹한 시간은 잠시, 그 순간 떠오르는 얼굴… 엄마였다. 엄마에게 정말 죄송하다고 전해달라며 말한 후 딴 세상으로 연기처럼 사라진 듯 기억이 없다.  

서울 을지병원에서 아홉 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했다. 회복실에서 몇 시간이 흘렀을까. 간호사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정신이 들며 살아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사이 온통 어둠이 공포로 바뀌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눈이 떠지지도 손가락이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여기저기 다친 몸은 둘째치고 긴 머리카락은 오간 데 없이 박박 깎였고 천 바늘이 넘게 꿰매진 얼굴에는 숨을 쉬게 할 콧구멍을 제외하곤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철 가면을 쓴 듯 무거웠지만 마음의 무게에 견주면 깃털처럼 가벼운 느낌이었다. 

 

사고가 나기 7개월 전인 1985년 5월, 각 지방과 여러 나라에서 입상한 후보자들이 본선인 미스코리아대회를 앞두고 함께 모였다. 나는 그해 미스부산 선발대회에서 미스부산 선으로 뽑혔다. 지방대회 진선미와 해외 지역 진선미는 서울에서 열리는 본선대회에 출전한다. 열흘가량 숙식을 하며 각종 행사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로 양로원과 보육원 시설을 방문이 잡혀 있었다. 그동안 KBS의 카메라는 모든 일정의 귀와 눈이 되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는다. 

어느 시설을 방문했을 때다. 미스코리아 대회 주최자 한국일보의 진두지휘 아래 행사가 진행되던 중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나는 흐느낌일까’ 하며 둘러보니 행사를 이끌어나갈 미스코리아 후보들이 눈물을 훔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시설이 낯설지 않은 나로서는 오히려 눈물짓고 있는 후보들 속에서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순간 스치고 지나갔다.

주최 측 사회자에게 마이크를 내게 넘겨달라고 했다. 사회자는 이런 분위기에 난감했던지 어디 한번 해보라는 맘으로 마이크를 건넸다. 나의 진행으로 분위기는 반전되어 웃음과 함께 화기애애하게 행사가 잘 마무리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나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 일 뒤로 합숙 기간 내내 어딜 가나 내가 마이크를 잡게 되었다. 그때가 내 운명의 또 다른 시작이었으리라. 

그때까지 부산 출신의 미스코리아 당선은 드물었다. 당연히 미스코리아라는 타이틀은 나와 먼 단어로 느껴졌다. 대회 하루 전날, 부산에 가기 위해 미리 짐을 꾸렸다. 우연히 운동하러 갔다 눈에 띄어 관장님의 지인이 미용실 원장이라며 소개를 해준 것이 여기까지 온 것이기에 젊은 한때 추억으로 충분했다 여겼다. 

그런데 합숙 기간 내내 카메라에 담긴 내 모습을 봤다며 방송국 피디가 나를 불렀다. 방송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했다. 운 좋게도 난 그해 1985년 4등으로 ‘미스코리아 한국일보’가 되었다. 대회가 끝난 뒤 KBS 토요일 저녁 나이트쇼 단독 MC의 행운을 얻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방송 출연으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해 미스코리아가 된 6명은 잦은 방송 등 여러 행사를 함께해 친해졌다. 5위는 미스코리아 태평양인 은희가, 6위는 미스코리아 보령제약인 현경이(현재 미국 여성 골퍼로 유명한 M 엄마). 하얀 눈꽃으로 천지가 유리같이 깨끗한 날, 20대 초반의 우리 세 명은 새해를 맞아 뭉치기로 한 것이다. 속옷부터 모두 검정으로 치장한 나는 어두운 그림자가 내 인생에 드리울지 상상도 못 한 채 길을 나섰다.

이때 이미 불행은 예고된 일이었던 걸까. 그날 이후 나는 6개월 동안 앞을 볼 수 없었고 10년 동안 일 년에 두 번씩 얼굴에 박혀있는 유리를 빼는 수술을 해야 했다. 그 뒤 30년이 넘게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아니 마실 수가 없었다. 괴물같이 나타나는 얼굴의 사고 흔적들 때문이다.

사고 후 기나긴 시간을 나 자신과 싸워야 했다. 왜 하필이면 내게? 20대 초반에 겪기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어서 죽음의 갈림길에서 고민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날 사랑한다고 믿었던 신에게도 등을 돌렸다. 사고가 나기 7개월 전 그해 미스코리아로 당선되어 분홍빛이라 믿었던 나의 20대는 내가 걸친 옷 색깔처럼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누구나 다 삶의 굴곡은 있다. 남의 것은 작게 보이고 내 것은 커 보일 뿐. 하지만 크든 작든 그 굴곡진 삶에서 헤쳐 나와야지만 한다. 살기 위해서 말이다. 어떻게든 시간은 지나간다. 버티다 보니 이런 나의 상처도 밖으로 꺼내 보일 수 있는 날도 왔다. 한쪽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고 했던가. 시간은 좀 걸렸지만 나에게도 또 다른 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젠 술 한잔을 기울일 용기도 생겼다.

필명: 메이 

 

‘글쓰는 사람들’은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한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한 달에 두 번 모여 좋은 글을 나누며 글쓰기도 하고 있습니다. 네 명이 번갈아 가며 연재합니다.

[이 게시물은 일요SISA님에 의해 2018-07-02 20:55:22 교민뉴스에서 복사 됨]
4 Comments
ana001 2018.03.25 01:10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겠지만
앞으로 남아있는 시간동안 쭈욱 감사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길 ~~~
메이 2018.07.09 09:58  
응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야 댓글 남기신것을 확인했습니다.
NZ FIND 2018.03.28 18:12  
좋은글 감사합니다
메이 2018.07.09 10:00  
감사합니다. 큰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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