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사람들(34) 뉴질랜드의 꿈나무들

문학의 향기


 

글쓰는 사람들(34) 뉴질랜드의 꿈나무들 <글과 사진_김인식>

일요시사 0 2013

 “미스터 킴,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같은 조에서 자원봉사 상담을 하는 중국인 안나가 물었다.

 “병원에서 하던 무료 대장검사 홍보 일은 작년 연말에 끝났고, 요즘 자유로운 백수로 사진 찍기와 글쓰기를 배우고 있어요.”

 “그럼 시간이 많겠네요?”

 “그런 편이죠.”

 “학생들 시험감독을 해 볼 생각 없나요? 큰돈은 아니지만, 며칠 사진 찍으러 다닐 기름값은 될 거예요.”

 이렇게 해서 뉴질랜드에 이민 와서 또 한 가지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시험감독을 하고 싶다는 이메일을 학교 담당자에게 보냈다. 며칠 후 답장이 왔다. 다음 주 금요일에 설명회가 있으니 신분증을 가지고 오라고 한다. 역시 키위 사회에서 아는 사람의 소개는 큰 힘으로 작용한다.

 서른 명 정도 설명회에 모였다. 남성 지원자는 네 명뿐이다. 스무 명은 전부터 시험 감독을 해오던 학생 학부모나 교직원 친지들이었다. 나같이 새로 지원한 외부인 몇 명이 새로 왔다. 동양 사람은 중국 여성과 나, 두 사람.

 학교의 시험 총감독 선생이 일정과 절차, 시험감독 요령을 상세하게 가르쳐 준다. 발생 가능한 돌발 상황과 대처 방법도 꼼꼼히 챙겨서 설명해준다. 지원자들에게 경찰 신원조회 신청서를 배부하고, 작성한 후 개별 인터뷰와 신분 확인까지 철저한 과정을 거친다. 일주일의 시험 기간 중 처음 이틀만 감독 일을 했다.

 

 드디어 첫날. 차가 막힐까 봐 일찍 출발했다. 사무실에 들러 시험지를 받아 시험장으로 향한다. 300명가량이 들어갈 수 있는 대강당이다. 시험감독 다섯 명에 책임교사 한 명이다. 학생들이 시험장으로 들어오기 전에 책상 위에 문제지와 답지를 배포해둔다. 대강당에는 서너 과목의 시험이 동시에 치러지고 여러 반의 학생들이 반별로 같은 줄에 앉아 시험을 본다.

 가방을 비롯한 소지품은 교실 입구에 놓고 들어가고 계산기가 필요한 과목 외 전자기기는 전부 끈 상태로 가방에 두고 들어간다.

 시계도 2018년부터 소지 못 하게 바뀌었단다. 대신 앞면 벽에 디지털 시계를 프로젝터로 비춰주고, 끝나기 한 시간 전부터 15분 간격으로 남은 시간을 말해준다. 시험이 시작되면 사전에 특별히 일찍 나가도 좋다는 서면 허가를 받은 학생 외에는 시험 종료 시각까지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한다. 화장실은 한 명씩 번갈아 다녀올 수 있고, 가고 들어 오는 시각을 개인별로 기록한다.

 시험감독관이 하는 일은 부정행위를 적발하고 이를 미리 방지하는 것으로만 알았다. 막상 해보니 학생들이 시험을 잘 치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능도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시험 시작 전에 책상다리가 네 개 모두 제대로 바닥에 닿지 않아서 건들거리는 책상은 마분지 접은 것으로 수평을 잡아서 건들거리지 않게 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시험이 시작되면 지정된 위치에서 감독하는 일과 동시에 학생들의 질문을 받고 대답해주거나 화장실 출입 등 제반 사항을 돌본다.

 십여 분이 지나니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시험지 답 쓰는 모습에서 대번에 모범생과 문제아(?)가 판별된다. 순간 이런 내 모습이 그간 받은 교육과 생활을 통해서 축적된 고정 관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 성적순으로 매김되는 우열과 석차. 공부 잘하는 학생은 훌륭하고, 못 하는 학생은 쓸모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는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생각을 바꾸어 긍정적인 관점을 가져 보았다. 조금 전에 생각하던 문제아와 모범생의 이분법에서 전혀 다른 생각이 든다. 내 앞에 보이는 이삼백 명의 학생 중에 내일의 총리가 나올 수도 있고 세계를 열광시키는 아이돌 가수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도 나올 수 있겠다. 히말라야를 세계 최초로 정복한 힐러리 경처럼 태평양이나 남극해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세계에서 제일 깊은 바다를 탐험하는 탐험가가 나올지도 모른다. 또 굳이 세계 최고가 아니더라도 뉴질랜드 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서 나름의 역할을 하면서 보람 있게 살아가는 뉴질랜더들이 다수 나올 것이다.

 마지막 날 오후 시험이 끝나고 시험지와 답안지를 걷는데 꽤 많은 학생이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Thank you so much!”

 그 중에는 ‘Sir’를 붙이는 학생도 몇 명 있었다. 시험 감독 중에 아마도 두 번째 같은 시험장으로 온 학생들인가 싶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좋은 교감을 가진 것 같아 마음이 뿌듯했다.

 

 132종의 언어가 쓰이고 있다는 이 나라의 다민족 특징이 시험장에도 반영되어 어림짐작으로 스물 이상의 민족이 이 강당에 섞여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전 3시간, 오후 2시간짜리 시험을 감독하면서 중복되는 학생이 없었다면 약 천명 가까운 학생들을 만났다.

 내가 이 학생들만 할 때 시험 치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시험이 없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생각도 해 봤었지. 이민 초기에 딸들이 칼리지에 다니던 때도 회상해본다. 그래 둘이 다 참 착하게 ‘틴에이저’ 시절을 보냈다.

 답안지를 빼곡히 채우는 학생이나 이름만 쓰고 두 시간째 딴짓을 하는 학생이나 모두 뉴질랜드의 꿈나무들이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바른 생각이 아닌 것 같다. 답안지 여백에 ‘왜 세 시간 동안 내가 여기에 앉아 있어야만 하나?’라고 써놓고 다른 짓에 몰두하는 학생. 그 학생을 보면서 저 학생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여유를 시험 감독을 하며 가져 보았다.

  

‘글쓰는 사람들’은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한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한 달에 두 번 모여 좋은 글을 나누며 글쓰기도 하고 있습니다. 네 명이 번갈아 가며 연재합니다.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8-11-20 19:18:45 교민뉴스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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