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사람들(9)] 엄마와 칼국수

문학의 향기


 

[글 쓰는 사람들(9)] 엄마와 칼국수

일요시사 0 2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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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오클랜드 서쪽에 산다. 와이타케레라 불리는 이 지역은 내 세울 게 별로 없다. 유명한 곳은 멋진 파도를 자랑하는 피하나 와이타케레 삼림 지역이다. 서쪽에는 한국 식당도 별로 없다.

 한국 음식이 먹고 싶을 때는 북쪽으로 간다. 한국 사람이 북적이는 북쪽에는 한국 식당도 많다. 그중에 하나가 타카푸나에 있는 한식당, ‘명동칼국수. 타카푸나에 갈 기회가 있으면 되도록 이 칼국수 집에 들른다. 예전에는 칼국수의 양도 상당했고 김치도 충분하게 먹을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양이 많이 줄어서 속이 상하지만, 그래도 국물 맛은 아직도 죽여준다. 끈적거리면서도 얼큰하고 시원한 맛.

 칼국수를 즐겨 먹게 된 건 엄마 덕분이다. 엄마는 칼국수를 좋아했다. 아마 엄마는 칼국수를 통해 힘든 생활에서 위로를 받으셨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지금 내 옆에 안 계시고 가끔가다 꿈속에서나 나타난다.

 

 50여 년 전에 부모님은 인천의 변두리에서 구멍가게를 여셨다. 아버지가 배신을 당한 것과 연관이 있다. 그 당시 다니던 공장이 문을 닫자 아버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친한 친구의 말을 믿고 공장을 떠나면서 받은 퇴직금을 친구에게 빌려주었다. 그는 돈을 들고 미국으로 날랐다. 집을 팔고 남은 돈으로 가게를 시작했다. 부모님은 배신의 아픔을 어떻게 이겨 냈는지 모르지만, 어린 나는 낱개로 파는 사탕과 삼립 크림 빵을 훔쳐 먹는 재미에 가난함을 몰랐다.

 아버지는 50cc 오토바이를 타고 동인천에 있는 도매상으로 물건을 사러 나가셨다. 동인천은 그 당시에 인천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양은 많지 않지만 한꺼번에 여러 가지 물건을 사 오셨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구멍가게를 만물 상회라 불렀다.

 엄마도 가끔가다 옷이나 신발을 사기 위해 동인천에 있는 시장으로 가셨다. 자유시장이었나. 슬프게도 시장 이름은 기억에 없다.

 두 분이 동인천을 가는 이유는 비슷했지만, 행동은 조금 달랐다. 아버지는 어디를 가든 혼자 가셨다. 자식들을 위해 맛있는 거를 사 온 적도 없다. 가끔가다 아들들을 목욕탕에 데리고 가곤 했다. 그렇지만 자식들의 등을 빡빡 밀기만 하셨지 목욕 후에 호떡이나 짜장면을 사 준 적도 없다.

 엄마는 종종 맛있는 거를 사 들고 왔다. 동인천에 가게 되면 엄마는 오부자네를 들러 칼국수를 시켰다. 어떨 때는 그 식당의 대변인이 된 듯 식당의 유래까지 설명해 주었다. 엄마가 이북에서 오셔서 그런지 그 식당 주인이 이북 사람이었다는 말은 빼지 않았다.

 오부자네에서 먹던 칼국수는 모시조개 국물 맛 때문이었는지 아주 깔끔하고 시원했다. 가끔가다 유부초밥이라도 추가로 주문하면, 나는 그 달짝지근한 맛을 즐기면서 아버지도 이렇게 맛있는 거를 사 주면 얼마나 좋겠냐는 상상을 했다.

 오부자네가 없어졌듯이 부모님도 오클랜드에 오신지 몇 년 뒤에 약속이나 한 듯이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 임종 때에는 자주 찾아뵙는다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과 함께 부모님이 기억 속에서 멀어지면서 무덤을 방문하는 횟수도 줄었다.

 

 어릴 적에는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의 배신, 그로 인한 궁핍한 생활을 부모님은 어떻게 견뎌냈는지에 관심이 없었다. 다만, 아버지의 늘어가는 술주정과 엄마의 잔소리가 싫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립이 가능해지자, 나는 부모님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아픔을 이해하려고 노력도 안 하면서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만 내뱉었다. 같이 있으면서도 다들 투명인간이 되어버렸다.

 정신과 의사인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가 주장했듯이, 아버지는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데서 오는 아픔을 부인(Denial),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이라는 다섯 단계를 거치면서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했을까. 생활의 여유는 어디서 찾았을까. 돌아가실 때까지 마음의 평안을 못 찾으셨을까. 여러 가지 생각은 꼬리를 물고 다가오지만, 답을 구할 대상이 없다.

 아버지는 친구의 배신으로 인한 충격 때문에 쓰러지지도 않았고 삶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자식들을 먹여 살리려고 일만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고마워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짜장면도 안 사줄까는 어릴 때의 불만이 나이가 들어 행동으로 표출되면서 아버지를 아프게만 했다. 이런 고통을 삼키려 아버지는 술을 더 드셨을 것 같다.

 아버지의 주량이 늘어나는 것만큼 엄마의 잔소리도 잦아졌다. 엄마는 모든 스트레스와 화를 아버지한테 푸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아주 가끔가다 칼국수 집에서 여유를 찾으셨다. 엄마랑 같이 있는 그 순간이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시간이었다. 그런 엄마를 위해 아버지를 성토하는데 한목소리를 보태기도 했다. 아버지는 외톨이가 되어 갔다. 철없던 행동이 후회스럽다.

  아버지 그 자체가 아닌, 술로 인한 아버지의 행동이 싫었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돌아가신 한참 후에 깨달았다. 잔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엄마가 없어진 한참 후에 엄마가 나의 안식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한동안 무척 힘들었다. 고아라는 느낌이 떠나지 않았다. 세상이 허전해 보였고 기댈 데가 없었다. 그럴 때 나를 위로해 준 곳이 명동칼국수였다. 칼국수를 통해 기억 속의 엄마를 꽉 붙잡고 삶의 고단함에 대해 하소연했다. 칼국수를 앞에 두고 엄마랑 같이 앉아 있으면 편안하면서도 속이 꽉 차올라 허전하지 않았다. 내가 나이가 들어가든 상관없이, 칼국수는 엄마가 그리울 때 나를 진정시켜 주었다.

 오부자네에서 먹던 깔끔한 칼국수처럼 정갈하셨던 엄마는 손이 크기로도 유명했다. 당신은 힘들어도 가능하면 남들한테 펑펑 퍼 주셨다. 명동칼국수에 가면 김치를 많이 달라고 해야지.

 오늘은 하늘이 유난히 푸르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본다. 아버지와 엄마가 저기에 계실까. 갑자기 마음이 든든해진다. 어쩌면 고아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핸더슨에 있는 거복식품점에 가서 칼국수 재료를 사야겠다. 차 열쇠를 찾는다. 오늘 엄마를 만나고 싶다.


글_정인화 

 

글 쓰는 사람들은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한 글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한 달에 두 번 모여 좋은 글을 나누며 글 쓰기도 하고 있습니다. 네 명이 번갈아 가며 연재합니다.


 

[이 게시물은 일요시사님에 의해 2018-07-17 20:19:23 교민뉴스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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